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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꼼쟁이 할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2009년 05월 06일 (수) 11:04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 진주교대 교육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김정부인 장례식모습 사진이다. 1912년 김정부인 서거 당시의 남강 배다리 모습이 또렷이 찍혀 있고, 멀리 진주성 안 집과 촉석루도 보인다. 
ⓒ 김정부인 홈페이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서양 말이라 발음하기도 어렵고, 말 그대로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그런데 구한말에 이를 진정으로 실천한 할머니가 있다. 바로 김정부인(金貞夫人, 혹은 정부인 김씨, 1843~1912)이다.
평범한 아낙네로 숱한 역정을 겪으면서도 혼자 힘으로 거만금의 재산을 모았던 여인. 많은 재산을 빈민구제와 교육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기부에 앞장섰던 할머니. 진주 땅 곳곳에 송덕비가 세워졌고, 고종 황제로부터 '정부인'이라는 봉작까지 하사받았던 인물.

경남 진주사람들은 그녀를 '꼼쟁이 할머니'라 불렀다. 김동민 작가가 최근 펴낸 <꼼쟁이 할매>(신원문화사 간) 속에 김정부인의 삶과 정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김정부인의 가르침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다.

먼저 이름부터 따져보자. 성씨만 '김씨'였지, 이름은 모른다. '정부인'은 황제로부터 받은 봉작(封爵)을 말한다. 그녀는 1897년 고종으로부터 봉작을 받았다. '중추원 의관'과 '가선대부 내장원경'을 지낸 남편(김재권)으로 인해 봉작을 하사받은 게 아니다. 김정부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봉작을 받았다.
"돈이 모이면 무조건 토지부터 샀다"
 
▲ 김동민 작가가 펴낸 <꼼쟁이 할매> 표지. 
ⓒ 신원문화사 
 
조선총독부가 발행(1933년)한 '보통학교 수신서'에 보면 김정부인이 소개되어 있다. '진취의 기상'이라는 제목에, 김정부인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근면·절약·저축하여 가산을 일구어 자치의 경지를 넘어 부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술해 놓은 것이다. 아침 일찍 큰 광주리에 채소를 이고 저자로 팔러 나가는 김정부인의 모습을 표현한 삽화를 실어 놓았다.

이런 탓에 김정부인이 '드러나지 않은 친일파 아니냐'며 오해하는 이도 있다. 이에 대해 김동민씨는 "어떤 기록이나 구전에서도 김정부인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면서 "김정부인은 당시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의식있는 인사들이 건립한 사학에 거금을 선뜻 기부했는데, 조선총독부가 김정부인의 정신을 소개한 것은 아마도 근검절약 정신을 강조하여 조선인의 물자 소비를 가급적 줄여보자는 엉큼하고 약삭빠른 계산에서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부인은 진주성 밖에 살던 김유한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나이 열일곱 살 때(1860년) 당시 진양군(현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에 살던 남편 김재권한테 시집갔다. 이미 가세가 기운 집안이었다. 그런데 혼례를 치른 지 몇 달이 지나 남편은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남편은 6년만에 돌아왔다.

그 시기에 김정부인은 더 단단해졌다. '노동하는 여자'가 된 것이다. 몸소 절구질을 하고 밤낮으로 길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가서 허드렛일 품팔이도 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개·소똥도 모아 거름이나 땔감으로 쓰려는 이들에게 팔았다.
악착같이 일하고 열심히 돈을 모았다. 일 귀신이 씌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김정부인이 눈을 돌린 것이 바로 땅이었다. 한 푼 두 푼 저축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무조건 토지부터 사 모았다. 자신의 땅이 조금씩 불어나는 재미에 노동이 힘든 것도, 독수공방이 서러운 것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시집 온 지 3년만에 논 13마지기를 살 수 있는 거금을 모았다고 한다. 김정부인은 남편이 집을 나간 뒤부터 하루 식사는 두 끼로 정했다고 한다. 육류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해서 매일 조기 값인 서 푼씩을 모았다고 한다.
김정부인은 당대 경남권 제일의 부자였다.

김정부인은 나락 3만 석을 생산했고, 이후 손자(김기태)는 충청도(특히 옥천)까지 땅을 사서 6만 석으로 늘렸다.

"재물을 잘 모으는 동시에 잘 쓰는 법도 알아"
'꼼쟁이 할매'는 재물을 잘 모으는 동시에 잘 쓰는 법도 알았다. 단돈 일전을 쓰더라도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정부인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힘들게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꼼쟁이'란 재물을 쓰는 데 있어 인색한 사람을 뜻한다. 김정부인은 '꼼쟁이 할매'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평생 힘들게 모은 돈을 힘없고 가난한 조선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는 창고의 쌀을 풀어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는 구휼사업을 했고, 인재 발굴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아 상업에 능력이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고향에 거금을 기부하여 공유재산으로 사용토록 하는 등 사회환원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부인은 손자로 하여금 진주보통학교 여학생 전용 교실건축비를 희사하게 했고, 지방지의 효시가 된 <경남일보>에 금화를 희사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1911년 현 진주 봉래초교 부근에 비석을 세웠다. 또 진주 금산면 송백리에 나룻배가 없는 것을 보고 통행인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나룻배를 마련했으며, 부근 사람들은 그곳에 송덕비를 세웠다.

김정부인은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한다. ▲"제사용으로 쓰는 토지를 사지 말라. 그것은 제사를 받는 영에 대해서 미안하기 때문이다", ▲"망하는 집안의 나머지 토지를 사지 말라. 이것은 가련하기 때문이다", ▲"공유물을 사지 말라. 그것은 문제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부정행위가 있는 토지는 어떤 경우에도 사지 말라", ▲"돈을 빌려주고 거기에 이자를 붙여 남의 토지를 취득하는 것은 결단코 하지 말라. 이것은 무정하고 남에게 원한을 사는 일이 된다"가 그것.

그랬던 김정부인은 1912년 숨을 거두었다. 진주교대 교육박물관에는 김정부인의 장례식 사진이 소장돼 있다. 그해 남강에 만들어진 배다리가 보이는 사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마치 '국상(國喪)'을 치른 듯 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정부인 묘갈명을 지은 성균관 대제학 김윤식은 숱한 덕행을 적어 놓은 뒤 "가난한 사람에게 두루 베풀고 공익사업에 기부한 것까지 친다면 다 기록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김동민 작가는 "김정부인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학생 교실을 지어 기증함으로써 최초의 남녀공학을 이루어낸 구한말 여성교육의 선구자"라며 "구한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김정부인의 덕행이야말로 어려움에 처한 오늘날의 지도층들이 더욱 본받아야 할 행동철학임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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