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이은상)과 무애(양주동)의 동거 하숙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두 번째 이야기는 단어 외우기(기억술術) 내기에 관한 것이다. '마산천재'와 '해서海西천재'의 맞대결이 볼 만한 것이었으리라.

　당시 무애는 스스로 '해서'가 문제 아니라 '해동海東천재'라 자임하며 있었고 고향 노인들의 '시회詩會'에서 노인들이 쓴 한시 10여수를 즉석에서 기억해낸 경력이 있었고 중학교 1학년때 영어단어 6천개를 외운 기록 보유자였으므로 '마산 수재'의 당돌한 제의에 묘한 미소로 수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노산이 먼저 무애에게 외워야 할 단어를 나열했다. '지팽이, 나비, 순이, 풀, 참새, 촌, 깜둥이, 빠나나, 궁둥이, 깨, 개미, 키쓰, 모자, 구름, 바다, 바위, 조개껍질, 세기世紀, 고양이, 눈, 이순신, 황진이, 손, 둘, 섬, 왜놈, 이(蝨), 칼, 맘보……' 무애는 일단 특유의 기억력으로 단어들을 기억해 내려갔으나 불과 열두개 쯤인 '키쓰'에서 멈추었다.

　무애가 노산에게 단어을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늠름히, 조금도 노력하는 기색은 없이 이 마산천재는 30개 단어에 이르고 있었다. 무애는 노산의 능력에 어안이 벙벙 "오불급야吾不及也라, 마산수재에게 졌다. 나의 천재호號는 취소하노라"하고 깨끗이 승복했다. 노산은 그날밤 내기에 이겨 일금 십원 수준의 술을 염상섭과 함께 무애에게서 얻어 마셨다.

　그런데 무애에게 반전의 기회가 왔다. 노산이 출타한 동안에 그의 책상 서랍을 열어본즉 그 밑바닥에 「기억술」이란 소책자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야시장에서 이삼십전 주고 사온 듯한 그 책에는 기억의 비법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심리학의 이른바 '관념 연합'에 의한 기억술이었다. 차례로 부르는 단어로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나가면서 기억하는 아주 간단한 비방이었던 것.

　무애는 즉석에서 머리를 굴려 지난번 노산이 제시했던 단어들을 이 비방에 따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지팽이를 짚고 나비를 좇아 순이와 함께 풀밭을 참새걸음으로 총총 걸어가다가 깜둥이가 먹다 버린 빠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궁둥이를 깨고 개미와 키쓰한 뒤에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나 구름을 쳐다보니 마치 바닷가 바위 위에 조개껍질이……"

　노산은 그날 저녁 리턴 매치의 도전을 무애에게서 받았다. 염상섭이 심판석에 서고 노산과 무애는 각각 일차전 술값 두 배를 심판에게 공탁금으로 맡겼다. 노산이 무애에게 단어를 제시하자 무애는 거뜬히 삼십 단어를 외웠다. 노산과 염상섭의 눈이 휘둥그래졌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번에는 무애가 노산에게 단어를 제시했다.
　잉어, 붕어, 준치, 칼치, 농어, 가물치, 방어, 모래무치, 도미, 가재미, 남치, 뱅어, 넙치, 병어, 메기, 숭어, 불거지.……

　무애는 노산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도록 같은 고기류에 속하는 단어만 제시했던 것이다. 노산은 자기의 비방이 누설되어 나갔음을 눈치 채고는 서랍을 후닥닥 열었다. 금방 얼굴이 노랗게 변색되었다. 노산은 그러나 마음을 곧 수습하고 "어서 술이나 사다 먹세. 떼었던 '해서海西' 천재의 호는 도로 반환하겠네" 하며 호탕한 웃음으로 그만의 낭패감을 씻어내었다.
　훗날 노산은 무애의 회갑때(1964년) 방명록에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재어학(於才於學), 백대일인(百代一人) - 노산鷺山"
　
　재주와 학문에 있어 3천년만에 한사람쯤 나오는 그런 천재라고 평한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쉬운 점은 노산의 회갑 방명록에 적힌 무애의 글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썼다면 뭐라고 썼을까? 기상천외한 글귀이거나 동서 고사(故事)에서 기묘하게 끌어다 쓴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