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저잣거리에 서 있는 현대인들은 생계와 맞물리는 틀 속에서 만큼은 무척이나 억척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만큼 정직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틀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은 좀처럼 드물다. 우리가 잠재적·표면적으로 가지고 있는 꿈, 혹은 환상이 자꾸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난해한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간결한 해답을 제시하는 모임이 있다. 바로 진주시 여성회관 수료생들의 모임인 덩쿨회(회장 전영숙)이다.
진정한 자원봉사단체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목에 선 그들이 목표한 것은 '우리의 눈이 어느 곳을 지향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그것이 덩쿨회의 정체성을 찾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 몸과 마음을 담그고, 흔들림없이 신명을 바쳐 그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그들만의 원칙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 원칙은 삶의 무늬를 맛깔스럽게 그려내는 동력이 되었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갖게 된 이유가 됐다.
덩쿨회의 정체성 찾기는 지금으로부터 1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88년 진주시여성회관 개관과 함께 여성회관 프로그램을 수료한 17명이 모여 지역을 위해 봉사를 하자는 의견을 모은 것이 지금의 덩쿨회의 모태가 된 것이다.
지금은 회원 수만 200명이 넘고 미용봉사에서부터 간병·목욕, 관족, 단학, 바느질, 순회미용봉사, 청소·말벗 봉사 등 규모가 커졌지만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작은 모임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덩쿨회 회원들은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을 먼저 찾았다. 농촌 마을을 찾아가 모내기를 돕고, 거리에 나가 풀을 뽑았고, 장애우를 찾아가 스스로 친구가 되면서 흔들림없이 신명을 바쳤다.
갓 시작된 덩쿨회의 정체성 찾기는 항상 변하지 않는 항심과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변성의 처절한 싸움터였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과 몸이 가는 곳에 주저없이 찾아 가는 것'이었다.
여성회관 수료생들이 늘어나면서 차츰 덩쿨회도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지역의 양로원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경로잔치를 열고, 기독육아원 원생들을 위해 손수 한복을 만들어 입혔다. 묵은 때가 앉은 의자에는 이쁜 의자커버를 만들어 씌웠고, 방안을 화사하게 만드는 커튼도 만들어 달았다.
'우리들의 손으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고, 삶의 저잣거리를 뛰쳐 나와 회원들 개개인이 정체성을 찾는 토대가 됐다.
사실 단체에 소속된 한 개인의 정체성 찾기는 만만치 않다. 개인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존재의미일 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원봉사를 통해 그들만의 정체성 찾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저소득 주민들을 위해 봉사를 하자는 작은 바람으로 시작된 순회미용봉사는 올해로 13년째를 맞고 있다. 지난 1990년 7월 7일 처음 봉사활동을 한 이래 미용봉사는 아직도 쉼없이 계속되고 있다. 사비를 털어 미용재료를 구입하고, 직접 농촌마을을 순회하면서 벌이는 미용봉사는 이제 덩쿨회를 대표하는 그들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요즘에는 힘든 일은 잘하지 않으려는 특성 때문에 미용봉사자들이 배출이 제대로 안되는 것이 고민거리다. 하지만 기존 미용봉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해마다 덩쿨회가 하고 있는 자원봉사 활동은 미용봉사를 비롯해 6개 분야의 전문봉사와 김장담가주기 등 2개 분야의 근로위문봉사가 있다.
전문봉사는 간병·목욕봉사, 미용봉사, 관족, 단학, 바느질, 순회미용봉사이고, 근로위문봉사는 청소·말벗봉사, 김장담가주기 봉사이다. 대부분의 봉사활동은 벌써 10년째를 맞고 있으며, 관족, 단학, 바느질 봉사는 자원봉사단체로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매주 둘째 화요일에 실시하는 관족봉사는 진주혜광학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봉사활동이 되었고, 단학봉사는 진주복지원의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특히 지난 1994년에 시작해 올해로 10년째를 맞고 있는 간병·목욕봉사는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노인요양원 성프란치스꼬의 집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지고 있다.
외롭고 소외된 노인들의 잠자리를 정리하고 구석진 곳을 치우며,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덩쿨회 회원들의 자원봉사.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덩쿨회 회원들의 봉사활동은 오늘까지도 쉼없이 계속되고 있다.
덩쿨회를 이끌어 가는 전영숙회장은 요즘 고민에 빠져있다. 스스로 자원해서 하고 있는 봉사활동이지만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써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형편이 여의치 못한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도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자체재원이 부족해 회원들과 회식 한 번 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미용봉사자들의 경우에는 손수 미용재료를 구입하는데다, 미용기구가 잘 망가져 개인적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덩쿨회 운영만큼은 철저하게 원칙론적으로 하고 있다.
간혹 각종 행사에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있지만 덩쿨회만큼은 '절대불가'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것이 곧 회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가정에서 먼저 인정받고 난 뒤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정에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는 대전제는 덩쿨회만의 대원칙이기도 하다.
덩쿨회 회원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나면 '오히려 봉사를 받은 느낌이 든다'고 입을 모은다. 설사 가정에 작은 문제가 있더라도 봉사를 다녀오면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 진주복지원에 봉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집에서 손수 음식을 장만해 복지원을 찾아갔더니, 원생들이 봉사자들을 보고는 숨거나 소리를 지르며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엔 복지원 봉사를 갈때마다 눈물을 훔치며 원생들과 함께 그 아픔을 나누곤 했다.
전영숙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엄연히 그곳에 있었다. 단지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아마도 덩쿨회가 찾고자 했던 정체성은 어쩌면 그들 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사실을 몰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