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르고 적막한 겨울이 싫은 사람은 평촌(坪村)마을에 가 볼일이다.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골골(谷谷)마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녀 사람사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
나즈막한 산 줄기에 얹혀 있는 마을의 고풍스러움과 산으로부터 발양되어 무르익은 자연의 생명과 기운을 한자리에서 맡을 수 있다.
마을 곳곳에는 제 철에 제 땅에서 나는 농산물이 그득하고, 사시사철 맛볼 수 있는 딸기와 꽈리고추로 풍성한 삶을 저축하고 있는 평촌(坪村)마을.
평촌의 초겨울 풍경은 가을이 남녘으로 내려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 내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마지막 불꽃처럼 단풍과 함께 쪽빛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감나무의 까치밥이 유난히 붉어 보인다.
옛날에 머골이라고 불렀던 평촌(坪村)마을은 덕오리(德梧里)에서 행정리로 나누어진 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103세대 372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시설채소 수출로 남부럽지 않은 농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곳이다.
한풀 꺾인 단풍의 쇠한 모습을 건너다 보며 들어선 불너미. 평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는데 가세(家勢)가 불같이 일어나 큰 벼슬을 한 사람이 났다고 한다.
불너미는 평촌 동쪽에 있는 마을인 불티에서 바라보면 마치 타오르는 불티처럼 넘겨다 보인다 해서 불너미로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평촌마을에는 산(山) 그늘의 느릿한 움직임과 휘청거리는 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이름모를 잡초들의 생명이 불같이 일어나, 고요한듯 하면서도 활발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미 가을걷이를 끝낸 황량한 벌판을 대신해 은빛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고, 그 안에는 이미 생명력을 잉태한 딸기며 고추들이 붉고 푸른 빛을 내며 또한 번 수확의 결실을 예정하고 있다.
불너미 마을 맞은 편에 있는 배너매마을은 미천장터로 가는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천지개벽때 배를 타고 장을 오갔다고 한다.
강(江)을 끼고 있지는 않지만 해마다 수침으로 큰 피해를 본 마을사람들에게 이 배너매마을의 배는 그저 옛 기억을 떠올릴수 있는 편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불넘어마을과 배너매마을에 있는 주머니처럼 생긴 주문골은 주머니골 혹은 금낭골로 불린다. 옛날 주문골에 비석이 2개가 있었다.
그런데 금산면(琴山面) 덕이부락에서 이 비석을 보면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덕이부락사람들이 와서 비석을 뽑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촌마을에는 고개가 많다. 평촌마을의 사재골 산비탈에는 제단이 3개가 있었는데, 해마다 2월, 3월이 되면 동네의 머슴들이 이 곳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한편 이 제단은 부모에게 불효하고, 마을의 물건을 훔친 도둑들을 단죄하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3개의 제단 중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제단은 동네어른들이나 유지가 앉았고, 그 다음은 농민, 마지막 제단에는 머슴들이 앉아 음식을 먹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심구시먼당에서는 7월 백중만 되면 소의 병이 낳기를 비는 제를 지내 마을이 일년내내 잔치가 벌어져 옛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평촌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에는 일년내내 삼년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옛날부터 마을에 세대수가 많고 인구가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부촌(富村)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불너미 서쪽에 있는 조조골(朝早谷)과 옛날 백정승의 묘가 있었다는 백정골도 평촌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그 깊은 골과 의연함을 빛내고 있고, 일제강점기때 부터 애기가 죽으면 갖다 묻는 애장터였던 정상골은 지금으로부터 40∼50년전만 해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나즈막한 산(山)과 골짜기(谷)가 만들어 내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평촌마을 사람들. 그곳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아기자기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솔가지 땔감을 한 짐 지고 배너매에서 배를 타고 미천장터로 가는 시골부부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가면 큰 사발 동치미 국물에 밤고구마 몇 덩어리는 얻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평촌마을.
평촌교를 지나 들어선 마을회관에는 김장김치와 막걸리 한 잔에 지난 세월을 더듬는 촌로(村老)의 주름진 얼굴에서 부터, 방금 막 비닐하우스에서 온 듯 흙 묻은 장화를 털고 자리잡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잿빛 겨울 하늘이 주는 무력감 보다는 삶의 기운이 힘차게 고동치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평촌마을.
산하가 얼어붙고 물기가 마른 겨울 들녘 숨가쁜 여정에서 평촌마을을 가본다는 것은 한줄기 옹달샘을 만나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