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산(山)에는 이름이 있지만, 그 모든 산(山)들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여도 잘 어울린다. 산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높은 산도, 나즈막한 야산도 자신의 모습에 걸맞는 이름 하나쯤은 갖고 있다.
그래서 산(山)은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지 그곳에 산(山)이 있고, 산과 닿아 있는 길(路)이 있기에 자신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정처없이 흘러도, 산(山)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산이 인간의 삶과 닮아 있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자리잡은 채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개가 끼면 비가 온다는 안개덤. 국도 33호선을 끼고 앉아 있는 이름도 없는 야산이지만 혈암마을 사람들은 안개덤과 함께 아침을 열어간다.
눈 비비고 일어난 신새벽, 안개덤이 자욱한 안개를 안고 있으면 농부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도로변에서 말리려던 벼는 집 창고에서 하룻밤을 묵고, 또다른 농삿일이 농부들을 기다린다.
지네가 살았다고도 하고, 여자의 음부처럼 생긴 굴이 있어, 마을사람들이 그곳에 다녀오면 바람이 난다는 전설도 갖고 있지만 안개덤의 이름을 지어 주지 못했다.
그것은 안개덤이 혈암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땅과 인연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도 33호선 도로변에 자리한 혈암마을은 대암리에서 행정리로 분리된 자연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92세대 316명의 주민들이 논농사와 딸기재배로 삶터를 꾸려 가고 있다.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듯한 도로변을 따라 자리한 혈암마을은 굼바위와 무상골을 품에 안고, 평범한 농촌마을로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나즈막한 야산을 펼쳐 놓은 혈암마을을 들어서자마자 먼저 접할 수 있는 것이 굼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지금의 대암교(大岩橋) 옆 정자나무 옆에는 자연동굴인 굼바우가 있다. 이 동굴의 길이는 약 20여m인데 지금은 동굴입구의 천정이 무너져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굼바우 입구에서 불을 피우면 명석면(鳴石面) 남성리(南星里) 석방(石防)에서 연기가 난다고 한다.
아직까지 마을사람들조차도 왜 굴입구에서 불을 피우는지, 과연 굼바우 동굴이 명석면 남성리까지 연결돼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집현면 정평리(亭坪里)를 가면 굼바우 전설이 보다 더 생생하게 전해진다.
정평사람들은 혈암마을의 굼바우에서 불을 피우면, 정확히 석달 열흘 후(100일)에 집현면 정평리(亭坪里) 정골의 호랑이굴에서 연기가 난다고 믿고 있다. 이 호랑이굴은 호랑이가 새끼를 치던 곳이었는데, 호환이 끊이지 않아 이같은 전설이 만들어 졌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 온다.
굼바우와 함께 혈암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400년의 역사를 가진 정자나무가 있다. 이 정자나무는 굼바우와 함께 수백년을 같이 해왔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굼바우의 전설을 보다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마을사람들의 말이 정자나무의 연륜을 입증하고 있다.
굴바우와 정자나무 이야기와 함께 무선동(舞仙洞)의 지명유래는 혈암마을 사람들의 성정(性情)을 읽게 하고 있다.
무상골이라고도 부르는 무선동(舞仙洞)은 선녀(仙女)들이 춤을 추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살기 좋고 놀기 좋은 곳이었고, 옛날에는 신선(神仙)들이 내려와 놀고 갔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일촌(一村)이지만 몇해전만 해도 부무골(付舞谷)이라 해서 몇가구가 살기도 했다고 한다.
굴바우와 무선동이 합하여 된 혈암마을은 이렇게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나즈막한 산(山)이 많은 혈암마을 사람들은 진솔하고, 진솔한 것을 뛰어 넘어 투박하기 이를데 없어선지 그들의 모습에는 가식도 군더더기도 없다.
계절을 따라 제 모습을 바꾸고, 하나의 자연으로 존재하는 산(山)처럼 혈암사람들의 삶도 그처럼 투박하고, 꾸준하다.
산이 많아선지 혈암마을에는 골짜기와 고개도 많다.
굼바우 남쪽에 있는 산지동과 옛날 정자나무가 있었다는 장자골, 혈암에서 지내리로 가는 길목이었던 샛고개도 있고, 탑고개는 예전에 탑이있었으나 길을 내면서 없어졌고 명석면 추동으로 넘어 가는 길이었다.
황새가 살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황새덤은 비상하는 황새형상을 하고 있고, 황새가 목을 축였음직한 혈암못은 마을의 젖줄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장골에서는 기왓장과 토기가 많이 발견되고, 모과등과 까마귀등도 해주정씨의 종산인 진등과 함께 세월의 흔적을 그려가고 있다.
집현면의 농촌정주생활권개발사업에 따르면 혈암마을은 오는 2005년 이후부터 마을내도로개설과 상하수도 정비와 같은 마을기반정비가 실시될 계획이다.
또한 농어촌도로정비의 일환으로 공동주차장과 버스승강장을 개설하고, 농로를 포장하는 등 생산기반정비도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산(山)으로 닿아 있는 길이 있기에 혈암의 고개, 골짜기, 등성이는 혈암마을 사람들의 삶과 다름이 없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산(山)과 함께 하는 삶은 자질구레한 일상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지난한 삶에 대해 일반인들이 간추릴 수 있는 보고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혈암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삶을 꾸려 나가는 마을사람들의 애환을 더도 덜도 아니게 담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이야기가 가치가 있든 없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그 삶이 우리들 삶의 평균점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