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와 진주 삼현여중
 
 진주 삼현여중 교정을 들어서면 화단가 시비(詩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예서체로 ‘我川詩碑(아천시비)’라고 되어 있는 비에 ‘가을’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카랑한 가을 하늘
베짱이 한마리에
비취 깨어지듯
온 골이 울리운다
시공을 꿰뚫어가는
푸른 넋이 있어라

흡사 가을 평온한 들녘에 누워 비취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베짱이 울음소리 귓전을 때리는 듯한 풍경을 상상케 한다. 짧은 시구지만 한없는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이처럼 자연 친화적인 서정적 발상을 통해 자라나는 2세들에게 미래의 꿈을 전하고 있는 시인 아천 최재호는 진주 사학의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삼현여중·여고의 설립자이다.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닮은 어머니상을 구현하기 위해 일찍이 2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로서도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1917년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 출생해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첫 시조집 ‘翡翠斷章(비취단장)’으로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람 이병기는 그의 첫 시조집 서문에서 “비취가 여늬 보석보다 차라리 눈부시지 못하 그 담박한 품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최재호씨의 시조도 화려하고 웅혼하지 못하나 소박한 서정이 더욱 우리의 심금을 울려 오는 바가 있다”고 했다.
아천의 작품 세계는 우리 고유의 전통성에 접맥된 풍부한 서정과 정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인간의 세상 일에 관한 깊은 정한과 애정 그리고 경이로움의 작은 환희와 감동들로 한결같이 일관하고 있다고 평을 듣고 있다.
아천은 우리 전통 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생전에 지역 유학자들과의 많은 교유를 통해 옛날 선비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

白沙에 뿌리 묻어 허기진 그런 날도
한 떨기 향기로 하여 찬물로 한 세월을
淸貧에 사옵는 뜻은 인욕이라 이르리

‘아천시집’에 실린 ‘난’이란 시조이다. 검소하고 청빈하게 살아온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옛날 선비들의 삶을 살고자 했던 작가의 진솔된 심정을 난을 보며 노래한 것이다.
시인은 지역사회를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해오기도 했다. 삼현여중고 설립을 비롯해 경남일보 사장, 한국 문인협회 진주지부장, 한국예총 진주지부장, 개천예술제 대회장 등 지역의 문화 예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통해 남다른 존경을 받아오기도 했다.
김석규 시인은 “순수와 전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온건한 노력과 창작의 자세는 아천 선생의 인격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문학은 곧 인간 그 자체이며 형식은 또한 인품이거나 인격으로도 비유되기 때문이다”며“항상 가까이에 산재하고 있는 제재들을 잘 닦여진 서정과 정서로 빚어서 우리 고유의 전통적 가락으로 풀어낸 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전아하고 말쑥한 품격과 운치에 젖어들게 된다”며 아천의 시세계를 말했다.

얼굴빛 봄눈이나 곧은 뜻 가을서리
비취 깨어지듯 온 골 울리더니
오늘은 솔바람 베고 영겁속에 잠들다

아천의 벗인 초정 김상옥이 그의 묘비에 새긴 글이다.


 
강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