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와 남강가 시비
 
 기자는 언젠가 진주에 강연차 내려온 신경림 시인이 이형기 시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낙화’를 막힘없이 낭송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겨보았다. 신 시인의 유수같은 낭송에 주위사람들은 혀를 두르며 감탄을 연발했다. 진주 남강가에 이형기의‘낙화’ 시비(詩碑)가 서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1957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 시는 ‘무성한 녹음’을 위해 떨어지는 꽃송이, 즉 낙화를 바라보며 인생사에서의 이별에 대한 통찰, 더 나아가서는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낸 수작이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낙화를 의인화시켜 낙화의 정경에서 모든 인간사의 이별, 죽음의 원리를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낙화’는 우리 시에서 발견되는 이별의 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1933년 사천 곤명에서 출생한 이형기는 1949년 17세의 중학생으로 ‘문예(文藝)’지에 추천받아 문단에 들어섰다.
이형기를 문단으로 끌어들인 것은 다름아닌 ‘개천예술제(당시는 영남예술제)’였다.
1949년 11월1일 열린 제1회 영남예술제(1959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을 바꿨다) 한글 백일장 장원을 한 것이다.
당시 진주농림학교 학생인 이형기가 장원, 삼천포 중학생인 박재삼이 시조를 써 차상을 했다. 이형기 시인은 당시를 이렇게 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예술제의 한글시 백일장과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진주농림학교엔 이경순 조진대 이병주 등 문인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이형기는 용기가 없어 찾아가지도 못했다고 했다.
이어“백일장의 장소는 진주공원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백일장 본부인 촉석루에서 자유시와 시조 두 부문으로 나누어 시제를 발표했다. 시제는 ‘만추’였고, 시조를 쓰는 사람에겐 ‘남강’이 제목이었다…오전 10시경부터 시작된 백일장은 오후 4~5시경 경남일보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나는 지나가는 행인인 체 하고 시간을 맞추어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내 이름이 장원으로 나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형기는 “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한아름 가득 안고/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는 당시 장원시 도입부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시가 실린 당시 경남일보를 애타게 찾기도 했다.
이형기씨는 진주농림학교 시절 당시 영어선생이던 소설가 이병주씨의 영향을 받았다.“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에 심취해 읽었는데 나중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나의 글에 인용하곤 했지요. 와일드를 알게 된 것은 소설가 이병주 선생 때문이었어요. 선생님은 당시 진주농림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연극지도교사이기도 했지요.”그의 회고이다.
1994년 7월 4일 이형기 시인은 쓰러져 지금까지 9년 동안 병마와의 기나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제1회 개천예술제 백일장 장원으로 말미암아 문단에 소개된 시인은 그 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고향 진주를 종종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병마와 싸우면서 멀리 진주 남강을 생각하며, 자신의 시비가 남강가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문학의 기틀을 다졌던 진주에서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강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