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변 뒤벼리를 휘돌아 나가다 보면 진주궁도(晋州弓道)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람덕정(覽德亭) 현판이 눈에 들어 온다. '덕(德)을 바라보고 덕(德)을 기른다'해서 이름 지어진 람덕정. 한 세기가 지나고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지금에도 람덕정은 진주 시가지를 의연히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정(亭)에 올라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시간의 물결을 아우르고 있는 남강과 삶의 분주함이 느껴지는 도심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람덕정 사대에 서서 시위를 당기고 화살에 실어 보내는 궁사들의 마음가짐은 때로는 경건하고 때로는 엄숙하기 까지 하다. 지금도 진주 궁도의 역사를 연연히 이어 가고 있는 람덕정은 최고의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충절의 고장 진주가 활(弓)과 인연(因緣)을 맺은 것은 1879년(己卯年) 고종(高宗) 16년의 일이다. 진주 최초의 사정(射亭)이자,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람덕정에 대한 기록가운데 1879년부터 1940년까지의 역사는 애석하게도 6.25사변으로 인해 멸실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886년에 조각된 비문과 1916년 제작된 현판으로 그 역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1879년 이전에는 촉석루 아래에서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1879년(己卯年)에 이르러서야 대안리(현 대안동)에 살고 있던 김문회(金文會)씨의 처 이씨(李氏)가 전(田) 1,000평을 희사해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帖石環樹下)에 정(亭)을 세우고 남사정(南射亭)이라 이름지었다. 이것이 람덕정의 효시이다.
남사정에서 습사를 하던 사우들은 1916년(丙辰年) 비봉산 의곡사(義谷寺)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정명(亭名)을 바꾸었는데, 람덕정(覽德亭)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람덕정(覽德亭)시대가 온 것이다.
비봉산 자락으로 정사를 옮긴 람덕정은 이후 24년동안 자리를 지켜오다가 인근지역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또 한번 정사를 옮겨야 했다. 사정부근에 인구가 밀집하면서 사우들의 습사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람덕정은 옥봉동 선학산 말티고개에 한옥 3칸을 신축해 사용했다.
이때 람덕정은 정사 이전신축기념으로 전국궁도대회(全國弓道大會)를 개최하는 등 진주궁도의 큰 물줄기를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진주의 궁도는 수난기를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맞았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 하의 치욕스런 생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람덕정 사우들도 해방과 더불어 하나 둘씩 고향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많던 사우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활을 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람덕정 최고의 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7월30일 인민군 폭격기가 진주시내를 폭격(爆擊), 시내가 폐허가 되면서 진주궁도는 쇠퇴기(衰退期)로 접어 들게 된다. 시가지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우들의 습사(習射)가 전면 중단된 것이다. 이후 3년여동안 진주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가 힘들어 졌다.
수난기와 쇠퇴기를 이겨내고 진주궁도의 맥을 다시 잇기 시작한 것은 1953년도의 일이다. 창원에서 이사온 제빵업자 김봉용(金奉容)씨가 남강 건너 죽림에 과녘을 세우고 습사를 하면서부터 다시 활을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맥이 끊길뻔 했던 진주궁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1955년 8월에는 김봉용씨 등과 같이 습사를 하던 람덕정 잔류 사우들이 남강교 동편 150m지점 부지 90평과 과녘터 200평을 마련하고 람덕정을 다시 재건했다. 이때부터 진주궁도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정사를 새로 마련한 사우들은 이때부터 각종 전국대회에 참가했으며, 그해 10월에는 전국남녀궁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람덕정 소속 도호원(都浩元)씨가 1등을 차지하고, 김봉용씨가 2등을 차지해 진주궁도의 명성을 전국에 드높였다. 바야흐로 진주궁도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63년 진주시의 하천직강공사로 람덕정 옆으로 흐르는 하천부지가 택지지구로 고시되고, 1970년부터는 장대지구 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람덕정 정사가 신안동 강변으로 다시 이전을 했다. 이후 람덕정은 1972년 4월26일 장대지구 택지조성사업으로 옥봉남동 산16-1번지에 정사를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람덕정은 람덕정사(覽德亭舍)를 중심으로 주변 선학산 임야 14,610평과 대지 934평, 밭 848평, 정사 건물 지상 3층 151.4평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더구나 진주궁도의 역사와 전통 뿐만 아니라 보유재산면에서도 전국에서도 으뜸가는 사정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람덕정은 활시위를 당기면서 덕(德)을 쌓고 심신을 수련하는 곳일뿐 아니라 사우들의 끈끈한 정과 우의를 바탕으로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람덕정은 오래된 역사만큼 화려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선 전국대회 규모의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만 해도 100여차례가 넘는다. 이는 1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람덕정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또 도단위규모의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은 단체전과 개인전을 포함해 300여회가 넘는다. 당시 대회에 나가면 '람덕정 궁사와 겨루면 못이긴다' '람덕정에서는 이제 그만 출전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지기도 했다.
현재 람덕정에 등록된 사우는 30여명으로 거의가 공직(公職)에서 정년퇴임한 사회지도자급 인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령도 50대에서 80대까지 고루 분포하고 있다.
유단자는 명궁이 3명으로 6단이 1명, 5단이 2명이며, 4단 1명, 2단 4명, 초단 6명으로 모두 14명이 있다. 그리고 공인심판자격증소유자도 3명이나 된다.
람덕정에는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사우들이 모여 따뜻한 차 한잔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세상사는 이야기며, 그날그날 있었던 얘기들로 정을 나눈다. 습사준비를 마친 다음 청백팀으로 나누어 편사(便射)를 시작하는데 9순(九巡)을 쏘아 승부를 가린다.
주변의 울창한 산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와 굽이쳐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시위를 당기는 사우들의 모습에서 람덕정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람덕정 사우들은 활을 당기면 건강관리는 물론이고 상호간의 친선도모를 통한 정신수양까지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어진 덕을 베풀고 성실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자중하는 법을 배우며 때로는 용감해야하며 상호간 예의를 지키는 가운데 승자를 원망치 않는다. 이러한 궁도정신이 몸에 배이면 저절로 존경받는 이가 된다는 사실을 람덕정 사우들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람덕정은 1993년도까지만 해도 전국궁도대회를 개최해 진주궁도의 명성을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람덕정에서 더 이상의 전국대회 개최는 고사하고 지방대회개최도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우들의 궁도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122년의 역사를 간직한 람덕정 사우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진주궁도의 새역사를 새로 써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강변을 돌아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람덕정의 역사만큼이나 진주궁도의 역사는 푸른 남강의 물줄기를 따라 연연히 그 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