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이경순과 진주 남강가
 
 진주 남강변에 시비(詩碑)가 하나 서 있다.
‘1905년에 나서 1985년에 가다/돈키호테를 닮고자 아호를 東騎라 하다.//孤高한 鶴처럼 행 맑은 모습/저항하며 살아온 淸貧 한세상//東京유학 치과의사가/교육자가 되시니 타협을 모르는 별난 교장선생이셨다//오로지 晉州만을 지키신/아나키스트로 허무주의 //문학속에 즐긴 白鷗의 노래//不義를 향하여 쏜 님의 화살은 /지금도 낚시대에 해가 걸린/공중에서 울고 있다.’
전 진주문화원장 이명길 박사가 지은 이 비문을 찬찬히 읽어보노라면 시인의 모습이 그대로 머리속에 떠오른다.
‘돈키호테, 고고한 학, 교육자, 아나키스트’등 시비의 단어들이 풍기는 시인의 모습은 암울했던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평생 ‘시대조류’를 거슬러 올라간 가난한 시골 선비가 연상된다.
동기 이경순.
진주인의 정신과 예술혼이 각별했던 진주의 시인이다. 1905년 1월 11일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에서 태어난 동기를 후배 문인들은 흔히‘아나키스트’시인이라고 부른다. 청년시절 ‘아나키즘’의 사상 단체인 ‘黑友연맹’에 가입해 아나키스트 시인들과 어울렸다. 나라잃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시인으로서 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사상 운동은 시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국권상실이라는 시대상황속에서 일체의 정치권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의식과 통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24년 일본 동경 사립 주계 상업학교 졸업, 1927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경제과 중퇴, 1942년 일본 포화시 경북의과의전 졸업 등의 학력에서 보듯이 당시 엘리트로서 편안한 길을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문학의 길을 선택해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동기는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 만으로 보지 않고 소속한 사회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반항을 택한 것이다.
동기는 해방후 진주에 정착해 진주 문단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1946년 설창수 유치진 등과 함께 진주시인협회를 창립하고, 지방 문예지의 효시인 시동인지 ‘등불’ 동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여인에게’ 발표, 1948년 경향신문 ‘盞’ 에 이어 1948년 ‘영남문학’에 ‘불여귀’ 등을 발표하여 사실상 문단활동을 하게 된다. 정식 등단은 1949년 ‘백민 17집’에 ‘유성’이란 작품으로 했다.
‘자!/그러면/離別을 합시다//별이 쏟아지는 검은 밤이었다//지내간 꿈을/푸른 歎息으로 불어놓고/머-ㄹ리 사라지는 발자취 소리…’(유성)
동기는 1949년 우리나라 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발기인으로 참여를 한 것을 비롯해 남해 창선 중·고등학교장, 진주상고 교장, 한국문협 진주지부장, 한국예총 진주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스스로 돈키호테를 닮고자 호를 ‘동기’로 지었다. “해방 이듬해 월북작가인 송영의 ‘황혼’을 진주극장에서 상영할 때 이병주씨가 연출하고 내가 동기라는 별칭으로 출연해 그때의 호칭이 필명으로 됐다”고 했다.
돈키호테를 닮고자 호를 ‘동기’로 지은 그에 대해 후배들을 지금도 그에 관련된 숱한 일화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동기시비’는 1987년 평소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덕 시인에 의해 발의가 되어 서정주 최재호 김윤양 이명길씨 등이 중심이 되어 2년만인 1989년 평소 그가 자주 거닐던 남강가에 세워졌다.
시비에는 시인의 시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 ‘저언덕’이 새겨져 있다.
‘내가 쏜 화살은/어디만치 가는고//구름 날고 바람 부는/저 언덕 고개 너머//오늘도/겨냥판 거리가 멀다’
동기는 1983년 비봉산을 오르다 다리를 다쳐 병석에 들어 투병 끝에 1985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희근 시인은“비봉산을 바라보면 눈물 나고나/일생을 시 하나만 손에 쥐고 살으신 분/동기 이경순 선생/꼭두새벽 오솔길로 휘청휘청 오르다가 /발하나 헛디디어 어덕에 굴러 떨어진/ 떨어지며 손에 쥔 시까지 어쩔거나 놓쳐버린/아나키스트 선생/ 그분이 떠올라 눈물 나고나…”라며 동기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