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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논개 바로 알기 2) 의기 논개라 불리다
글쓴이 : 황경규 날짜 : 2015-06-09 (화) 14:01 조회 : 3983
※ 이 글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범수 선생의 글을 인용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논개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진주의 관기였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함께 죽었다'

진주의 선비 정대륭(1599~1661)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남강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경종 2년(1722)에는 진주의 백성들이 진주선비 명암 정식(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특히 '충렬실록'에 의하면 정식은 당시의 우병사인 최진한(재임기간 1721~1722)에게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啓請)토록 끈질기에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논개의 순국사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전개했다. 한편으로는 전 별장 윤상보를 앞세워 장문(壯文)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우병사 최진한의 신보(申報)에 의거하여 경종에게 계문(啓聞)하게 되었다.
경종은 예조로 하여금 ㅁㄴ밀히 검토한 후에 급복(給復)의 특전을 시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때는 순국한지 130여년이 지나 문적이 족속을 찾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진한은 뒷날 좌병사로 전임된 후에도 우병사 재임시에 매듭짓지 못한 논개 포상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계속 게청하여 '논개가 의기로 호칭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관기 논개를 의기 논개로 호칭하게 되었다.
영조 16년인 1740년 병사 남덕하(南德夏 : 1688~1742)가 의기 정포(旌褒)를 계청했다. 드디어 왕의 윤허가 내려졌다. 의기 논개를 모시는 사당은 이름은 '의기사(義妓祠)'였다.
그 후 정조 3년(1779)에 이르러 병사 홍화보는 의기사를 보수하였고, 순조 23년(1823)에는 목사 홍순백이 이를 새로 지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목사 정현석이 '의암별제'를 특설하였다.
그리고 의기 논개 제향은 영조 16년 이래 250여년동안 진주의 기생들이 매년 음력 6월 그믐에 봉행하고 있고, 1992년에는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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