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일등 참모 정도전은 사직(社稷)을 세우면서 기제사 지내는 상차림표를 공표했다.
껍질은 두껍고 안에 붉은 도포를 걸쳤지만 속살은 백옥같은 '밤'과 잘 익으면 살색이 붉은, 그러나 단 하나뿐인 단단한 씨앗을 가진 '대추', 그리고 껍질은 연해도 씨앗이 단단하고 살빛이 붉은 '연시'를 쓰게 하고 상차리는 법도(法道)도 상세하게 정해줬다.
잘 아시다시피 어동육서(魚東肉西), 홍동백서(紅東白西) 등등의 상차림을 의미한다.
옛 것이라면 하품부터 해대는 신세대를 생각해서 간단히 풀어보자면 대강 이렇다.
생선은 오른쪽이요, 육미는 왼쪽이며 면서변동에 붉은건 오른쪽, 흰 것은 왼쪽에 놓으라는 말이다. 정도전이 정한 이런 상차림은 오행(五行)과 도참(圖讖)에 근거한 것이었고 이후 백성들은 이를 모범답안으로 삼고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상차림이 생긴 연유야 어찌됐던 간에, 그때 귀신들은 살아서도 먹고 싶은 것 못먹고 살았기에 죽어서나 제대로 먹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산사람들이 자고 일어나서 하는 아침 인사가 "진지드셨습니까"였을까.
그러니 표준 제사 상차림표가 나왔다지만 민초들이야 어디 여기에 해당될 법한 소리인가. 하루 세끼 때우기도 힘든 판에 말이다. 그래선지 옛날 귀신들은 묘지에서 나와 지나가는 과객을 잡아먹고, 더러는 남의 집 찾아가 어린아이도 잡아가곤 했다는 전설도 만들어 냈다. 모 방송국에서 해마다 납량특집으로 재탕 삼탕을 해대는 전설의 고향의 인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가정의례준칙'이라는게 만들어졌다. 하도 시절이 하수상하던 때다 보니 백성들이야 따라할 밖에.
게다가 근대화(近代化)의 물결이 밀물처럼 닥치면서 제삿상도 차츰 그 면모가 바뀌어 갔다. 제사상에 바나나와 햄버거를 올리는 좀 심각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달걀 부침개 등 생전에 좋아하는 것들이 오르는 경향(?)이 늘면서 귀신들도 그 입맛을 맞춰가게 됐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요즘에는 마마귀신도 사라지고, 소아마비 귀신도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입 맛 변한 귀신들은 '못된 것'들 잡아가는 일도 자꾸 없어지고 말이다.
하긴 요즘에는 인터넷이 발달하다보니 신문기사도 1분 차이로 특종과 낙종이 갈리는 세상이다 보니 뭐든지 빨리 빨리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도가 넘쳐도 한참 넘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필리핀산 수입 바나나를 올리는 상차림은 둘째치고, 조상 모시는 시간은 아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모임에서 노닥거리며 느긋하게 술 한 잔 하다가 시간이 다돼서야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난리부르스를 춘다. '오늘은 맛있는거 해놨을까'하고 잔뜩 기대하고 들어서던 조상은 제삿상 구경도 못하고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것이 요즘 세태인 것이다.
이건 진짜 실화(實話)다.
하는 일마다 새끼 꼬이듯 일이 꼬이던 어느 사업가가 절을 찾아가 천도제를 지냈다. 그런데 천도제를 지내던 스님이 갑자기 목을 놓고 우는게 아닌가. 천도제가 끝난 뒤 그 사업가가 의아해하며 스님에 물었다. "스님, 왜 그렇게 목놓아 우셨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처사님. 조상께서는 저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지난 몇 년동안 당신 조상께서는 기일때마다 밥 한 그릇, 숭늉 한 대접도 드시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셨답니다"
깜짝 놀란 사업가가 되물었다. "한번도 잊지 않고 기일때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마련해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한번도 드시지 못하시다니요?"
스님이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상께서 오시는 시간에 맞춰 상을 차려내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오시기도 전에 상을 물리니 당연히 드실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그래서 오실 때 마다 서운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쯤은 우리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설을 맞아 더욱 경건한 마음가짐을 갖고, 다시 한번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요새 귀신은 뭐하고 사누. 그런 놈들 안 잡아가고. 쯧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