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시(詩)를 쓰는 친구가 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녀석은 한 후배의 표현대로 죽음에의 예감에 집착했었다. 자신의 육체적 징후를 통해 몸 속 깊이 퍼져 가는 죽음의 증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예측 못한 사이에 그의 시(詩)는 절망적인 삶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펜과 원고지, 그리고 쓰다만 원고지 석 장만 남겨 놓은 채.

말(言)이 시(詩)가 되고, 시(詩)가 말(言)되는 친구였다.

나란히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빈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을 보고 친구는 내게 물었다. 
"친구야! 저 구름은 어디서 왔을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 글쎄"
어느새 친구는 몸을 일으켜 저만치 걷고 있다. 하늘만 응시한채….
다시 내게 묻는다.
"친구야! 같이 갈래?"
"집에?"
"아니. …."
그후로 친구의 말수는 눈에 띄게 적어졌다. 적어도 내가 묻지 않는 한, 말을 걸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친구는 아무도 몰래 길을 떠났다. 자신속에 키워왔던 절망을 안고….
그리고 나는 몇 해동안 친구를 볼 수 없었다.

일요일 아침, 학교 운동장이 북적댄다.
운동장 구석구석에 텐트가 들어서고, 교정을 가로 질러 오색 깃발이 내 걸렸다. 스피커에서는 철 지난 유행가가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고, 때가 되니 동기들도 어슬렁 어슬렁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간만에 양복에 넥타이를 맨 녀석도 더러 눈에 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 오늘 만큼은 불알친구들이 다 모인다.
인상 더럽게 쓰고 다니던 인상파 기훈이도, 틈만 나면 교실바닥 비벼대며 춤바람 난 듯 춤을 춰대던 인규도 여전히 건들대며 씨∼익 웃으며 왔다.
결코 믿을 수 없는 무용담을 펼치며 친구들 기죽이던 용구 녀석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공부와 원수라도 진 듯 책만 파고 들던 수호도 오늘만은 참석했다.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 항상 부지런을 떠는 동수녀석은 새벽부터 나를 불러 냈다.
"야! 임마. 퍼뜩 나온나. 지금 시간이 몇시고" 설치는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이다.
"술도가하는 경수 집에 가서 막걸리 싣고, 저 아랫동네 푸줏간에 가서 고기도 찾아 와야 하는데. 니 지금 뭐하노. 자나?"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녀석이다. 친구들이 '명예총무'라는 직책을 떠안길 만큼 친구 일이라면 한마디로 극성이다.
자건거에 리어카를 매달고 술도가 들렀다가, 푸줏간에서 돼지 한 마리를 싣고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구수한 고기 냄새와 코를 찌르는 막걸리 냄새가 벌써부터 군침을 삼키게 한다.
갑자기 동수가 씨익 웃더니 한마디 한다.
"야!"
말 안해도 나는 잘 안다. 동수 녀석은 운동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막걸리 한 잔이 그리웠던 게다.
"야! 야! 그냥 가자. 너 또 퍼질러 앉아서 막걸리 한 통 비울셈이냐?"
눈을 찡그리며 애원하는 동수녀석을 재촉해 운동장에 도착하니, 벌써 잔치판이 벌어졌다.
춤의 대가 인규는 우리 동기 텐트 앞에서 벌써 스텝을 밟고 있고, 인상파 기훈이는 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저 자식은 음악만 나오면 그냥 가만있지를 못해요. 아이고 지겨워라. 내 언제까지 저 놈의 꼬라지를 봐야 하노"
말을 그렇게 하지만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는 폼이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다. 학교 다닐적에도 저 두 녀석은 항상 다퉜지만, 제일 친하게 지낸 친구이기도 했다.
지루한 개회식이 끝나자 마자, 아니나 다를까 거나한 술판이 벌어진다.
"야 임마! 수호야! 자식 너는 아직도 책만 잡고 사냐? 이리와 술 한 잔 해라"
"어허, 창동이 너는 웬 양복이냐. 야!야! 사람 좀 살자. 니는 체육복이 딱 어울리는기라"
오가는 말이 욕투성이라도 언제나 정이 넘친다.
공차러 갔던 녀석들이 풀이 죽어 돌아왔다. 후배들과 한 판 붙었는데, 기운이 달렸는지 두 골이나 먹고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내친김에 친구들이 한마디 거든다.
"나이 먹으면 다 그래. 야! 술이나 한 잔 하자"
다시 술이 한 순배 쯤 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술 잔만 기울이는 체육대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멀리 교문앞에 웬 사람 하나가 들어오지 못하고 멈칫 멈칫 한다.
푹 눌러쓴 모자에 점퍼 차림의 중년신사.
'누굴까?'
텐트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있는 춤쟁이 인규를 끌어내다 시피해 교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교문앞에 서 있던 사람이 뒤로 돌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쫓아 뛰었다. 뒤에서 인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어디 가냐?"
쉬어 비틀어진 인규의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뛰어 가는데, 비탈길을 올라가던 그 사람이 갑자기 '푹'하고 쓰러졌다. 나는 가쁜 숨을 간신히 참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왜 도망치는 겁니까? 누구세요?"
갑자기 그 사람의 어깨가 들썩 거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가 축처진 어깨사이로 흘러 나왔다.
"친구야! 내다. 철헌이"

시(詩)를 쓰는 내 친구였다.
홀연히 떠나 소식 한 장 없던, 시(詩)를 쓰는 내 친구가 돌아 온 것이다.
나는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친구도 나도 말이 없었다.
시끌벅적한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멀리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 너명씩 짝을 지어 수근거리고 있었다. 인규 녀석이 입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친구와 내가 텐트쪽으로 다가갔다. 친구녀석들도 눈을 비비며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고함을 질러댔다.
"야이 자식들아! 뭐하고 자빠져 있노. 우리 친구 철헌이가 왔다 아이가!"
 
스텝밟던 인규놈이 벌떡 일어섰고, 인상파 기훈이와, 용구, 수호가 저만치서 손을 내 저으며 맨발로 달려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