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다. 일본인 양조장 머슴으로 일하던 떠끄머리 총각이 해방이 되면서 주인이 일본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양조장을 물려 받게 됐는데...
갑자기 머슴에서 주인으로 격상된 이 총각, 그날 이후부터 어느새 지역의 유지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거들먹거리고 다녔는데, 어느날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지역유지랍시고 동네 하나뿐인 학교 졸업식에 축사를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터. 막걸리는 동네사람 취할만큼 줄 수 있는데, 그것만은 안된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지역의 어른이 한말씀 하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나.
아는건 막걸리 만들고 술찌꺼기 팔아먹는 재주밖에 없는지라. 그렇다고 지역유지 체면에 원고 써달라는 얘기는 차마 못하겠고.
달랑 하나있는 자식놈은 유지 아들 행세하느라 주색잡기는 천하제일이라 자부하건만 자신보다 더 까막눈이더라나.
날은 점점 다가오고, 뽀죡한 방법은 생각안나니 죽을 맛인데.
하루 이틀 시간은 가고 드디어, 졸업식 날 아침. 이 양반 차림새 보소. 말쑥한 양복을 한벌 걸친것까지는 좋았는데, 긴장 푼답시고 아침부터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고는 털레털레 식장에 턱 들어서니.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들었는지, 그리고 왜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앞이 캄캄했다나.
오랜만에 매 본 넥타이를 고쳐잡고, 연단위에 올라선 이 양반 하는 말.
"봄 햇살은 땡땡 내려쬐도 막걸리는 안팔리지요"부터 시작해서 횡설수설하더니 급기야는 '김일성 만세, 이승만 죽일놈'에 까지 갔더라나.
졸업식에 참석해 느긋한 눈으로 축사를 듣고 있던 순사나리, 눈이 휘둥그레 지더니, 당장 수갑부터 덜컥 채워 끌고 가는데...
순경에게 끌려가던 이 양반 하는 말. "내 뭐라카데, 나는 안되는기라"
낮에 우는 닭은 잡아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제시간이 아닌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일어나 울고, 다들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 일한다면 그 또한 제 일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다.
한때 '5도10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부를 이용해 권력을 사고, 또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자신의 휘하에 둘려는 자들을 이름이다.
아직도 우리 삶의 한 귀퉁이에는 자신의 성을 굳건히 쌓고 그 휘하에 모든 이를 두려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상살이가 너무 척박해 그런가.<200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