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과 수곡면
조선조 고종 31년(1894) 4월 28일 전봉준의 동학당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는 등 10여 군․현이 함몰되자 조정에서는 동학군 진압을 위해 4월 30일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894년 5월 2일과 5일에 청나라 군대가 인천과 아산만에 도착했는데, 5월 6일에는 불청객 일본군도 천진조약(1885)을 구실로 인천에 상륙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이를 항의함과 동시에 철군을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거부하고 5월 9일과 12일에도 계속 군대를 파견하더니 급기야는 내정개혁을 요구(5.23)하고 나섰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에서 내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내정이 부패한 탓이라면서 6월 1일에는 소위「내정개혁방안요령」이라는 5개목까지 제시하게 된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혁은 스스로 진행할 것임을 통고(6.14)하고 일본군대의 철수를 계속 요청했다.
이에 일본군은 6월 21일부터는 궁성을 포위하여 고종을 협박했고, 6월 23일에는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7월 20일에는 끝내 갑오경장의 윤음을 반포하게 했다.
이와같이 일본은 우리 정부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친일정권을 조성하여 국권을 침략했고, 전봉준은 그들의 구호였던「척양척왜(斥洋斥倭)」중에서 척양(斥洋)을 지양하고 척왜(斥倭)인「왜적토벌」과「항일구국」을 부르짖으며 9월 초 2일에 다시 봉기하니 이것이 이른바 「구월기포(九月起包)」이다.
1876년 개항으로 우리 사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강제로 편입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상품경제의 발전이 새로운 외국상품의 이입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토착산업과 자급자족적 부문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농촌경제에도 큰 충격이 전해지게 된다.
새로운 학문과 종교, 등도 우리 사회에는 큰 충격으로 작용하게 되고 그에 대한 다양한 형식의 대응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향촌사회 내에 머물러 있던 보수 사족층들은 대개 위정척사(衛政斥邪)적인 입장에서 정부의 개항(開港)과 개화(開化)시책에 반발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1860년대에 최재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변화를 바라는 계층 특히 농민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동학의 조직은 1893년경 진주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덕산(德山)에는 백락도(白樂道)를 위시한 동학세력들의 거점이 형성되고 여기를 기점으로 서부경남 일대에 동학조직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가운데 경상우도동학당요란(慶尙右道東學黨擾亂) 경황(景況)과 이에대한 의견(意見)이라는 일본측의 자료에 의하면 수곡면 주위에 있는 청암(靑巖), 사월(沙月), 시천(矢川), 삼장(三壯) 등에도 동학이 극성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봐서 수곡면 지역에서도 동학도들의 활동이 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과 접하고, 서쪽과 북쪽도 다른 산맥과는 연결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이다. 현재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와 북방리에 걸쳐 소재하고 있지만, 동학운동 당시는 진주목 북평면에 속하였다.
때문에 진주의 동학운동을 말할 때 이 산을 ‘진주 고승당산’이라 하고,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서부 경상남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주동학군’이라 부르고 있다.
역사적 배경
동학혁명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1894년 2월에 발생하여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경상도를 비롯한 삼남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듬해 4월 전봉준 이하 동학 지도자들이 처형당하면서 종식되었다.
진주 지역에서도 진주 사람 백낙도(白樂道, 일명 白道弘)는 이에 앞서 1892년 전라도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柳海龍)으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진주를 중심으로 동학을 퍼뜨렸으며, 동학운동 때는 지리산 근처 덕산을 근거지로 봉기하였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발단
전봉준의 동학군이 1894년 2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전라도 지역에서 세를 떨치고 있을 때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에서는 4월에 봉기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의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가 서울의 대리공사에게 보낸 전문 내용에는 “경상도에 있어서도 충청도와 전라도 양도에 가까운 지역에는 동학당류가 많아 동당의 소굴이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경과
일본군의 침입에 자극받아 동학군은 9월에 재봉기하였는데, 이때 진주에서도 다른 지역과 동시에 봉기하였다. 진주동학군은 9월 2일 산하 73개 면의 책임자에게 격문을 돌리고 1천 여명의 군중대회를 열어 국가의 안위에 대하여 그 방도를 강구하였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진주동학지도부가 통문했던 내용은『주한일본공사관기록(국역본)』가운데「진주초차괘방(晋州初次掛榜)」에 잘 나타나있다.
진주초차괘방(晋州初次掛榜)
“국가의 안위는 국민의 생사에 있고, 국민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케할 방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國之安危在於民之生死民之生死在於國之安危則豈可無保國安民之道乎)
우리 진주민들은 모두 이산된 지경에 놓여 있으나 특별히 구제할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달 초 8일(양력 10월 6일) 오전에 각리(各里)마다 13명씩 일제히 평거(平居) 광탄진(廣灘津)으로 모여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의논하여 주시면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갑오 9월 초 2일“
이 통문을 보면 이것은 일종의 동원령이었다. 73개 면의 수장에게 보낸 것으로 봐서 1천여명의 군중대회를 열어 국가의 안위에 대해 그 방도를 강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 이때의 진주지역 동학세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여세를 몰아 진주동학군은 시내로 쳐들어와 진주성을 점령하였고, 진주병사 민준호(閔俊鎬)는 이에 대처하지 않고 부하들을 이끌고 친히 동학군을 맞아들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p170)』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전 진주병사 민준호는 그들이 무리를 모으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기세를 도와 오늘의 화근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극을 받은 일본군이 진주에 파병하여 공세를 취하자 진주성을 장악했던 동학군은 9월 11일 금오산 아래 대치로 진영을 옮겼다.
그런데 진주성을 점거했던 동학군은 9월 초(양력 10월 8일)에「재차사통(再次私通)」이라는 통문을 또 각 리동(里洞)에 보냈다. 재차사통의 내용은 다음을 보면 동학군이 금오산 아래로 옮긴것을 잘 알수 있다.
재차사통(再次私通)
“도착하는 즉시 각리 각동의 리임(里任)과 동장(洞掌)들은 이 사통문을 띁어 보고 민폐를 교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동(大洞)에서는 50명, 중동(中洞)에서는 30명, 소동(小洞)에서는 20명, 더 작은 동(洞)에서는 10명씩 내일(9월 11일) 오전에 다시 일어나 대치(大峙 ; 하동군 금남면 금오산 아래)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중략…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14~5년간의 흉년을 거친 뒤 또 77일간의 대한(大旱)을 만났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온갖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갑오 9월 초 10일‘
이 재차사통(再次私通) 문에 의해 ‘곤양 서쪽 10리쯤 되는 안심촌(安心村) 남쪽 금오산아래 대치로 옮긴 동학군은 일군의 추격을 받고 ’사망 5명, 생포 28명, 약간의 유기품‘ 등의 피해를 입은 후 다시 단성(丹城)으로 옮겼다.
이후 일본군은 진주동학군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계획을 세우고, 먼저 진주지역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각 고을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학을 제거해야 하고, 진주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덕산의 동학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동학군은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진주를 비롯한 하동·곤양·남해·사천·단성 등지의 동학지도부는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총공격하기로 하고 단성으로 집결하였다.
그 상황을 당시 일본군 장교는 “진주부 동쪽의 문산과 집현전 아래, 그리고 단성 등지에서 동학당 4, 5백명이 모여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려고 하며, 그 세가 화급하다”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당시 진주지역의 동학접주는 손은석(孫殷錫)·박재화(朴在華)·김창규(金昌奎)·백주응(白周應) 등이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세가 좋은 고승당산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겨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11월 10일 일본군이 총을 발사하며 침입을 개시하자 진주동학군은 고승당산의 석루를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신예무기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고승당산 전투 후 일본군은 철수하고 진주에는 관군 100명을 두어 수비케 하였다. 이리하여 진주지역은 겉으로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동학군의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전국적인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추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진주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왜적토벌’과 ‘항일구국’이라는 우국충정의 이념이 뒤에 있은 의병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구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
수곡면의 동학농민운동
1894년 1월 고부민란을 계기로 호남지역에서는 동학농민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5월 7일 전주화약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지만 6월말 일본군의 불법적인 궁성침입 소식이 알려지면서 농민군이 재차 봉기하게 된다.
서부경남지역에서도 9월 1일부터 동학군이 봉기하게 된다. 사실 영남지역에서도 1월경부터 각 읍 곳곳에서 민란이 속출해 감영이나 각 읍이 지방통제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월 1일 하동의 동학도가 호남 동학군의 지우너을 받아 하동을 장악할 무렵 진주에서도 동학도들의 대집회가 열리고 진주읍내에 대도소(大都所)가 설치된다.
수곡면과 가까운 단성현 지역에서는 7월말부터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었다. 9월 18일 진주에 집결한 서부경남 각 지역의 동학군들은 수일동안 대집회를 열고 농성하다가 각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한다.
이 무렵 감영과 일본공사관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을 투입해 진압할 것을 논의하고 9월말경 하동과 진주 부근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리하여 이틀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중 중요한 전투가 9월 29․30일의 하동전투, 10월 10일 곤양 금오산전투, 10월 14일 고승산성 전투가 있는데 이러한 전투에서 서부경남 동학군의 주력이 크게 타격을 받고 그 이후 점차 활동이 침체되어 간다.
이중 고승산성 전투는 수곡면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본군의 진입으로 단성지역 일대로 피해있던 동학군들이 전열을 정비해 진주를 공격하려고 수곡촌(水谷村)으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14일 수곡촌에 집결했다.
여기에서 고승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인용해 둔다.
고승당산(高僧堂山)은 속칭 고시랑산, 일명 고성산이라 하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와 대방리에 걸쳐 소재하고 있다. 해발 185.3m인 이 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 동·남쪽은 들판으로서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과 접하고 서쪽과 북쪽도 다른 산맥과는 연결되지 않은 천혜의 요새이다.
이 고승당산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진주목 북평면에 속해 있었다. 여기에는 자연으로 된 석루가 있는데 동학군은 그 석루를 더 축성하여 일군에 대비하였다. 이때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 제4중대장 영목(鈴木)대위는 단성의 동학군이 수곡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개 소대로 편성된 휘하의 1개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수곡으로 진격해 갔다.
그리하여 고승당산의 진주동학군과 일군과의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무기나 전투기술 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은 얼마 안가 산을 점령했다. 산꼭대기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서북 덕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p240)」에 의하면 『어제 11일 오전 4시 진주를 출발하여 서쪽 30리 남짓한 곳에 있는 수곡촌(水谷村)에 모여 있는 동학당을 공격하려고 그 마을에 갔더니, 동학당이 산과 들에 가득차서 대략 1,400~1,500명이 있었다.(수곡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4~5천명이라고함) 8시 5분 그들이 사격해 옴으로 응전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수곡면에서 동학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 부언하기를 그들의 부상자 명단과 더불어 「적(賊) 사자급유기품(死者及遺棄品)」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수곡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적(賊) 사자급유기품(死者及遺棄品)
「즉사 186명, 생포 2명, 화약 약 30관, 한전 6관7백90문, 승마 17두, 소 2두, 잡품가마니 1개, 쌀 5두, 총 136정, 칼 18자루, 나팔 3개, 큰북 3개, 기 3개, 화살 2속, 탄환 약 5관, 동제본 5개, 창 54자루」
이와 같이 진주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1개 중대의 신예무기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곳의 대일본군 전투는 관군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큰 뜻이 있다.
영목대위의 11월 12일자 「제5보고서」에 의하면
“어제 11일 수곡촌으로 진격하기 전, 토포사 지석영 및 영장 박영진 등과 협의하여 그 병사(통영병 100명, 진주병 208명)로 하여금 한쪽을 담당케 하려 했는데, 그들은 우리 군사의 일부를 갈라 그들을 따르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주에 남아서 동성을 지키라고 하였더니 기뻐하였다. 이와 같은 형편이므로 차후로는 혼자(일본군)만 각지에 이르러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수곡촌 산야에 널리 깔려 있던 동학군들은 일부는 고승산성으로 물러나 방어준비를 했고 일부는 북쪽으로 퇴거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있자 산성의 동학군들은 산꼭대기에 의지해 완강히 저항했고, 북쪽으로 퇴거했던 동학군들이 일본군의 우측을 공격해 왔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일시적으로 당황했고, 부상자도 3명이나 생겼지만 무기나 전투기술에서 월등한 일본군은 얼마안돼 산을 점령하게 된다. 산꼭대기의 방어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서북쪽 덕산 방면으로 후퇴했고, 일본군 한 소대가 이를 추적하다가 돌아와 수곡과 백곡 부근에서 며칠 머물러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수거한 동학군 사체만 186구였고, 그 이외에 퇴주하면서 수십명의 폐사된 동학군도 있었다.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에 따르면 「창촌리 안골 이장한(李章漢」)의 말에 의하면 이때 창촌리 사람들은 밥을 지어 동학군들에게 날라다 주는 등 여러 가지 지원활동을 했다는 말을 선대로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또 조계마을의 이진택(李震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마을 앞 덕천강 연변의 소로를 따라 자주 행진해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산쪽이나 집의 구석으로 피해 숨어 다녔다고 한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곡면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으로 등록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성낙주(成洛周)는 동학농민혁명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894년 10월 하동군 고성산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를 했다.
이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5조 동법 시행령 제9조의 규정에 따라 2006년 11월 20일자로 성낙주를 동학농민혁명참여자 유족으로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