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을 따라 들어가면 지금 이 순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세상이 요즘이다. 하지만 사건과 사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아도 사람들의 진득한 생활 속의 진면목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오랜 시간 대화를 한다 해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눈빛을 교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서로의 마음이 있듯이 말이다.
진양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미천면 오방리는 바로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곳이다. 올망졸망 키 낮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은 고즈넉한 인상을 풍기지만, 그 안에 어떤 비밀을 간직한 듯, 직접 가서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예측할 수는 어떤 기운을 안고 있다.
하지만, 산간마을이라 해서 그들의 살림을 우습게 본다면 큰 착각이다.
오방리는 대한제국 말엽까지는 머구방 또는 모방이라 불렸고, 그 후 설매곡면 오방촌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촌동, 덕진동, 오방동의 일부를 합해서 오방리라 칭한 뒤 미천면에 편입됐는데, 왜 오방촌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내력을 따라가 보면 그 대답이 나온다.
이조시대 이 마을에는 유명한 특산물이 있었는데, 바로 목화와 닥나무 그리고 감이었다. 해마다 추수 때가 되면 집집마다 목화 팔아 천 냥, 닥나무 쪼아 천냥, 조랑조랑 감을 따 천 냥어치의 수확을 얻었기 때문에, 살림이 넉넉했을 뿐 아니라 나라로부터 ‘촌(村)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농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의령에서 40리, 합천 삼가에서 40리, 진주에서 40리..., 다른 지역과의 거리가 먼 오방마을은 성질 급한 현대인들에겐 여전히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각 장면마다 새로운 배경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듯이, 오른편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며 달려드는 넓은 논밭과 짙은 숲을 감상한다면 그리 지루할 일도 없으련만, 주위를 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리는 까닭에 시간은 빨리 헤치워야 할 무엇으로 다가오는 건 아닐까. 전쟁 시절마다 환란을 피해 숨어들어 오는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하니, 그 지형이 어떠했을 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이렇게 지형이 멀고 험해 다른 지역과의 관계가 소원했던 탓인지, 오방마을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형 관련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마흔고개에 대한 마을 어른들의 증언은, 옛날 이곳의 지형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생생하게 대변하고 있다.
마흔고개는 오방리 상촌에서 미곡리 넘어가는 고개로 두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숲이 얼마나 울창한 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에도 고갯마루를 들어서면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햇살 좋은 한 낮에도 볕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고개를 넘다 짐승이나 도적떼의 횡포를 당했다는 소문이 흉흉했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적어도 마흔 명의 사람은 모여야 고개를 넘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고개를 마흔고개 혹은 마꼬개, 마앙골, 사십재가 불렀다고 전해진다.
현재 마을회관 아래 있는 들은 구랏들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내려와 부딪히는 곳에 굴이 있고, 구랏집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집은 온데간데 없고 집터만 남아있는 상태로 대밭이 형성되어 있다.
상촌 서북쪽 절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 41호로 지정된 오방산조선조팔각형고분군이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조선 태종 때 영의정 부사를 지낸 문충 하륜 일가의 것이다. 하륜은 1365년 공민왕 14년에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태종의 옹립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로 동방의 장자방이라 할 정도 지략이 뛰어나 태종을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죽자 그의 공적을 기려 태종이 직접 내린 시호가 바로 문충이었다. 
고분군은 하륜의 묘를 비롯해 조부인 문정공 하시원과 조모인 진양 정씨, 부친인 하윤린과 모친인 진양 강씨 등 모두 6기의 무덤으로 구성돼 있다.
진양 하씨 3대의 문중묘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들의 역사적인 업적도 업적이지만, 무덤의 형태가 중요한 문화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조부 조모 부친 모친 순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말 조선초기 묘의 형태로 봉분 아래 틀을 잡아 두고 있으며 봉분 주변을 돌로 에워싸고 있다. 특히 하륜의 묘는 팔각형의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조선조 초기 묘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바위에 낀 짙푸른 이끼나 바람 때문에 까맣게 변한 바위가 산 자도 죽은 자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힘을 새삼 일깨운다. 
분묘에 오르는 산입구에는 하륜의 제사를 지냈던 오방재와 함께, 그 왼쪽편에 또 다른 문화재를 볼 수 있다. 바로 경상남도 지정유형문화재 제 191호로 지정된 부친 진양부원군 하윤린의 신도비가 그것이다.
하윤린은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의 침입을 당한 군졸과 백성들을 구제한 행적으로 널리 칭송을 받았는데, 바로 이 같은 행적을 기려 조선 태종 16년에 세운 것이 이 신도비이다. 무엇보다, 비석에 새겨진 글이 대제학을 지낸 변계량의 것임을 안다면 하윤린의 행적은 물론 그의 아들 하륜의 명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비를 세운 이후에는 왕실주변의 권력층을 중심으로 신도비를 설치하게 되는데, 진양부원군신도비는 이런 양상을 반영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