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촌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달이 외로운 시각, 새들도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때다. 하지만, 시골 부엌에서는 부지런한 어머니들의 하루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식구들의 고단한 잠을 깨울세라 조용조용 밥을 지으신다. 달그닥 달그닥 그릇 부딪히는 소리는 그러나, 이미 온 식구들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어머니만이 낼 수 있는 그리운 자명종 소리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안개에 둘러싸인 논을 살피러 이미 집을 나서고 안 계신다.
마을은 고요했다. 큰 부자는 없어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더불어 평화로웠다. 집집마다 뿌옇게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새들도 박자 맞추어 재재거린다. 누런 보리밥으로 배운 채운 자식들이 소란스레 학교로 달려가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제도 그랬고 그 전날에도 그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땅과의 하루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논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옛날에는 그랬다. 불과 십 수년 전만 해도 그것은 낯익은 시골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금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아침밥상을 소란하게 만들던 자식들은 대부분 외지로 떠나갔고, 쌀농사는 농산물 수입 개방을 이기지 못해 애물단지가 될 판이며, 농사짓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사람들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남은 젊은 청년들은 시집올 색시가 없어 결혼 못하는 농촌총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하지만, 모든 동네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점촌마을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견고해 지는 사회 양극화 현상과 이제는 별 이슈도 되지 못하는 극심한 이농현상에서, 운 좋게도 저 만치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시골마을이다.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해가 갈수록 농가호수가 늘어나는 부자마을인 것이다. 
미천면의 중심도로라고 할 수 있는 지방도 1032호선을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이 마을은 마치 성격좋은 사람 곁에 친구가 많듯이 주변에 여러 동네와 팔짱을 끼고 있다. 어옥리 덕진마을과 벌당리 정호, 정성마을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점촌은 원래 설매곡면 신촌동이었다가, 나중에는 오방동까지 합쳐 신촌으로 불렸으나, 지난 1986년에 오방리에서 분동 되면서 점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방리에서 분리되던 당시에는 10여호가 될까말까하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호수가 그때보다 서너 배나 늘어난 상태. 그러다 보니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마을은 활력이 넘쳐나 보인다. 
무엇보다 점촌마을의 3, 4월은 눈부시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땅이 조심스레 기지개를 킬 무렵, 마을은 연분홍빛 매화꽃에 휩싸이는 것이다. 옛날 마을의 언덕배기는 물론 쪽발골이라 불리는 미천초등학교 동쪽 골짜기, 그리고 마을 동쪽 과실밭에 집중적으로 자생하는 매화로 인해 마을은 동쪽에 과실밭이 있다고 하여 동매(東梅)라는 애칭까지 얻을 정도였다. 이 무렵 마을은 차디찬 벼랑 끝에 몰래 핀 한 송이 꽃처럼 은근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다.
매화와 관련된 이름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동매에서 진우 박동환이 학동들을 가르치던 서당, ‘매화학원’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미천면은 물론 인근 대곡면과 집현면, 멀리 진주시, 의령군과 산청군 등지에서도 배움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이 마을에서는 매화만 타오른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학구열도 함께 타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마을 사람들이 점촌이란 이름 대신 매화마을로 마을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행정당국에 건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실행되지는 못하고 있다.
다른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점촌의 산과 골짜기와 재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점촌의 안산은 큰 안산과 작은 안산으로 구분되는데, 소가 풀밭에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큰 안산은 소의 머리, 작은 안산은 소의 꼬리부분이라는 것이다. 중간부분은 우복등이라고 불린다.
소와 관련된 재미난 이름이 또 하나 있다으니, 바로 황소등이 그것이다. 황소등은 점촌 간숫골과 쪽밭골의 마지막 등을 가리키는 말로, 소 먹이를 담는 구유를 닮은 골짜기가 상봉 남쪽에 있었는데 이여송이 붓으로 구유통을 치는 바람에 통의 양쪽끝이 끊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점촌이 부자마을이라는 부러움을 사는 것은 밤농사 때문이다. 까칠까칠한 가시를 가진 밤열매가 이 마을 살림살이를 부드럽게 만드는 일등공신인 셈인데, 이는 미천면의 주 특산물이기도 하다. 그 외 고추와 딸기, 오이 농사 등 시설재배도 많이 하지만, 미맥위주의 논농사는 겨우 한 해 식량을 할 정도가 고작이다.
또한 마을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일대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골통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최근까지만 해도 골통품의 잔재인 사금파리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는 데, 그래서 분명 토굴꾼임에 틀림없는 낯선 사람들이 마을을 제 집 드나들 듯 넘나들었다고 한다.
매화와 밤과 골통품과 토굴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부조화에 배시시 웃음이 난다. 사금파리로 배불릴 생각 말고 매화 향기로 마음을 채우고 싶다면 주저말고 점촌으로 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