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쌀농사의 끄트머리에 있으나, 농부들의 가슴속에선 항상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정미소(精米所)이다. 동네 아이들에겐 수시로 드나들던 놀이터였고, 어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던 정미소는 대개 마을의 중심에 자리잡은데다 공장과 비슷한 모습을 갖춘 유일한 건물이어서 위용마저 풍겼다.
양조장과 더불어 지역유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던 정미소는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지금은 누더기처럼 기워진 함석을 머리에 인 채 쓰러져 가기 일보직전의 모습으로 남아 옛기억을 떠오르게 하거나 아련한 추억속의 일부로 자리잡아 가고 있을 뿐이다.
정미소는 현대사회에 있어 날로 피폐해져 가는 우리의 농경문화와 농촌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 시대의 아픈 역사이자 상징물인 것이다.
대평면에는 내촌 암말의 이시복이 운영하던 물레방앗간과 성찬석이 운영한 내촌정미소, 김영상이 운영한 중촌정미소, 황상택이 운영한 신풍정미소가 있었고, 상촌리에 상촌정미소가 있었다.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 사평마을의 사평정미소(沙坪精米所).
대평면에서 가장 오래되었던 사평정미소의 운명도 자손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대평사람들의 아픈 기억처럼 물에 가라앉은채 지금은 대평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사평정미소는 비록 80년대까지만 해도 제분기 등 정미시설이 굉음을 내며 기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평정미소가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게 된 것은 쌀의 생산량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다. 대형 도정공장의 등장에 이어 소규모 도정기가 농가에 보급되면서 정미소의 기능이 줄어든데다 도시에서 대형유통업체가 구멍가게를 몰아내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농촌지역인 대평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가내수공업 수준의 정미소는 기계를 보강하는 한편 차량배달을 시도하는가 하면 떡공장으로의 변신도 시도됐지만 생계조차 꾸리기 힘든 사양산업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정미소들은 일제 강점기 때 그 규모가 확대돼 공장형태로 나타나면서 근․현대적인 방앗간인 정미소가 됐다. 대개 정미소는 이(里)단위 마을마다 있었는데 특히 대평면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정미소가 많았다.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평 무를 비롯해 각종 시설채소 재배로 인해 진주시에서도 부촌이었던 대평면에 이러한 정미소들이 앞다투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평면의 정미소들의 운명은 남강댐 건설과 함께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69년 남강댐 건설로 수많은 농토가 수몰되면서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서 다시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한 2차 수몰로 나머지 지역도 수몰됨에 따라 대부분의 정미소가 거의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대평면 사평정미소는 얼마전까지만해도 일제 때부터 시작된 정미업의 명맥을 계속 유지해 온 지역의 몇 개 남지 않은 향수어린 정미소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이 정미소는 수몰이 임박한 1997년 말까지도 시설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정미소였다.
원래 사평정미소는 일제말 이 마을의 강형수가 처음으로 소규모 정미소를 지어 정미업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됐다. 수몰이전까지 수차례의 증․개축을 거치는 동안 사평정미소는 5차례나 주인이 바뀌었으며, 끝내는 쇠락을 거듭하다가 90년대에 들어와 수몰지 건물로 보상처리돼 그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수장되기 전까지 사평정미소의 내부시설에는 쌀이나 보리 또는 밀 등의 곡물들을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 시설과 동력전달장치 등의 목조시설물들이 웅장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해방 직후 제작돼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제분기계의 나무문에는 한문의 행서체로 쓴 ‘회전식 제분기'라는 제품명과 ‘신농기계제작'이라는 제작사의 주소지가 붓글씨로 표시돼 있어 이채를 더했다. 제분기 제작사의 이름에 나타난 ‘신농'은 옛 중국의 전설에 따라 지은 것으로 최초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준 ‘신농씨'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신농기계에서 제작된 제분기가 수십년동안 사평정미소의 정미기계로 사용되었으나 이제 더 이상 밀가루가 흩날리는 정미소의 요란한 모습이나 제분기의 시끄러운 소요동력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수몰지로 퇴락하는 사평과 정미소는 찾는 이들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역사의 물속으로 사라졌다.
들녘의 모든 길들이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 멍석만한 크기로 날아들던 참새떼와 앞마당에 넘치던 나락 냄새, 바삐 움직이던 마을사람들로 가득하던 사평정미소. 이렇듯 사평정미소는 시대를 이어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결국 실패하고만 늙은 혁명가처럼 삶을 다하고 말았다. 마치 대평의 아픈 역사처럼.
그 외에도 대평면에는 이시복이 경영했던 내촌 안말 물레방앗간, 성찬석이 경영했던 내촌정미소, 김영상이 경영했던 중촌정미소, 황상택이 경영했던 신풍정미소, 상촌정미소 등이 있었으나 남강댐 수몰로 인하여 폐업했다.


마동정미소(馬洞精米所)
마동정미소는 1947년에 내촌(새터)에 사는 성재기(成在基)가 일제 10마력 발동기(중유)를 들여와 운영했다. 대평면을 비롯한 30리 내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마동정미소에 와서 보리(정맥), 밀(제분), 벼(정미)를 가공했는데 면내에서는 처음이었다. 그 뒤에 중촌정미소, 신풍정미소, 대평정미소, 사평정미소가 생겼다.
특히 마동정미소는 다른 정미소에서는 볼 수 없는 이불 솜을 탈 수 가 있어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필수품인 이불 등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기계를 가동했다고 한다.
마동정미소는 이후 내촌에 사는 성찬석(成贊錫)이 인수받아 운영해 오다가 남강댐으로인한 수몰로 인하여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