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의 고향 어은(漁隱)

대평면 어은(漁隱)마을은 면내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웃 옥방 대평마을과 함께 한들(大坪)으로 통칭되는 곳이다. 어은(漁隱)이라는 마을이름은 마을 앞 강가에 지금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은어, 눈치, 치사어, 피라미 등 수 십종의 물고기가 숨어 사는 지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의 폭은 적어도 300m는 넘었고 강가에는 수몽석이 즐비하게 깔려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던 마을이다. 강마을인 어은마을은 농토가 기름지고 농업용수의 공급이 유리한 지형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수리조합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거의 전 면적이 밭으로 되어 있어 대평 무를 심거나 후작으로 보리(大麥)나 밀(小麥)을 심었다.
어은마을 사람들은 주식인 쌀을 경작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적었기 때문에 밭에서 수확한 무를 벼와 교환하여 식량을 조달하기도 했다. 강(江) 마을인 탓도 있지만 물물교환이 이루어진 곳은 나루터였다. 대평의 무를 구입하기 위해 어은마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동 옥종을 비롯해 수곡, 내동, 사천 곤명, 산청 단성 등지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벼를 무와 교환하기 위해 벼 5～6승(升)을 가지고 밤밭나루배로 도강해 어은마을로 찾아왔다. 당시 배 삯으로는 세 홉들이 박 바가지로 한 바가지씩 받았는데, 나룻배로 도강한 인원수도 하루에 평균 1,000～1,600명이나 되었으니, 그 양이 무려 석섬(三石)에서 다섯섯(五石)이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들 전역이 쌀과 무의 물물교환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대면서 물물교환 방법도 다양했다. 어은마을에 제매재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의 유래가 재미있다. 무를 구입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한들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무 이렁을 발로 대략 측정해 주인과 흥정을 한다. 흥정이 끝나면 추산한 무 가격만큼 벼를 지불한 뒤 무를 뽑아 나룻배를 건너 고개를 넘어갔는데 이 고개가 제매재고개이다.
이 고개가 너무 험하여 무를 지고 가던 사람들은 무를 많이 주면 무거워 욕보이게 한다고 무 밭 주인을 욕하고, 적게 주면 적게 준다고 해서 욕을 하며 넘어갔다는 고개이다.
또 어은 북쪽으로는 강을 건너는 한강나들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남강물이 평소에는 얕아서 인마차(人馬車)가 마음대로 월강을 하던 곳이다.
이처럼 어은마을은 대평면내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살았고, 무 재배로 부촌에 속한 편이었다. 그러나 밭 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논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보(洑)를 축조하기 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안사영보(洑)이다. 조선조 말엽 전 면적이 밭으로 되어 있던 한들을 논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사영이라는 인물로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앞 강 여울에 보(洑)를 축조할 계획을 세웠다. 안부자는 돌 한 짐에 엽전 한 닢씩 주고 돌을 져다 모아 보를 축조하고 소남덤(대평리 지역) 밑으로 수로를 만들어 한들 밭에 물을대 논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수로를 내려던 곳의 지형이 워낙 낮아 결국 실패를 하고 만다.
한들을 논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1933년 지판(池板)이라는 일본인이 기술자인 김차용과 김종화라는 두사람을 고용해 양수장을 만드려는 시도를 했다. 가스를 사용하는 원동기로 양수장을 설치해 약 2,000여평에 이르는 밭을 논으로 만들어 이앙까지 했으나 기계의 힘도 약하고 양정이 높아 실패했다.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대평양수장(大坪揚水場)이 설치되면서 이 일대는 밭이 논으로 전환되는 일대혁신이 일어남과 동시에 수리조합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54년 정부에서 일본인이 양수하던 장소에서 약 250m 북쪽으로 150마력의 모터 2대로 양수장을 설치한 것이다. 그 결과 90정보에 달하는 밭이 논으로 전환되었고 어은부락은 수리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어은마을은 1954년 수리조합이 설립되기 전에는 대평면내에서 가장 빈곤한 마을이었으나 수리조합의 설립 이후에는 가장 살기좋은 마을로 변하였다.
어은마을은 남강댐 건설 이후에도 마을의 인구는 크게 줄지 않았다. 앞서 말한대로 남강댐 건설로 가장 피해를 적게 받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69년 남강댐 준공 이전 154호였던 어은마을은 남강댐 건설 이후 112호로 급격한 인구감소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은마을이 ‘대평딸기’의 고장으로 거듭나는 저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은마을 전체 112호 중 딸기나 수박, 호박 등 시설채소 재배에 종사하는 농가는 모두 80여호에 이르렀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딸기는 이웃마을의 딸기와 함께 ‘대평 딸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림과 동시에 마을의 주소득원이 되었다.
어은마을에서 시설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남강댐 건설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마을 앞 들판의 대부분이 하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특히 어은마을이 대평딸기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새로운 기법의 비닐하우스 농법을 개발한 이 마을사람 김수현의 공로가 컸다. 김수현은 비닐하우스의 보온관리법으로 수막보온방법을 개발해 시설비 절약으로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수막식 보온방법은 야간에 비닐하우스내 온도유지를 위해 종래 거적을 덮던 방식에서 탈피해, 기존의 비닐하우스 비닐 아래에 다시 비닐을 씌워 이중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따뜻한 온도의 지하수를 이용해 보온효과를 유도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열풍기를 사용하는 보온방법보다 설치비나 유지비면에서 수 십배의 경비절감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어은마을에서 생산된 딸기나 수박 등은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회원으로 되어 있는 대평딸기작목반(부광회)를 통해 공동으로 출하시키고 있다. 이는 중간상인들의 농간으로 인한 금전적인 손해를 최소화하고 농민들의 고소득을 보장해 주고 있다.
이렇게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한 어은마을은 정부의 남강댐 보강공사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남강댐 보강공사가 끝나면서 삶터이자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삶 터를 지키기 위해 관계당국에 진정도 하고 때로는 실력행사도 해봤지만 결국은 희망을 일구었던 땅을 물속에 묻어야만 하는 아픔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물고기가 숨어 사는 지형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어은(漁隱)마을. 마을이름이 붙여진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어은마을 사람들은 정든 삶터를 물고기들의 집으로 내어 주고 새로운 곳으로 삶터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