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길(路)이란 그렇다. 길이 없으면 없는 까닭에, 길이 있으면 있는 까닭에 멈출수 없는 발길일수 밖에 없다. 파로호 얼음장에 풀어 놓는 환상의 봇짐과 같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소설의 한 대목처럼 대암마을 가는 길에 숯고개에서 잠시 여장을 푼다.
개발(開發)이라는 미명을 앞세운 도로공사로 숯고개는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둥지이기에 더욱 애틋해 보인다.
마을사람에 의하면 숯고개에는 탄교(炭橋)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는 숯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큰 길로 대암리와 냉정리를 통하는 길목에 흐르는 정수천(亭水川)을 건너가는 다리였다.
해마다 비가 많이 오면 나무로 된 다리가 썪자, 숯을 구워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숯다리라 불렸고, 이 숯다리에서 100m지점에 있는 냉정리로 넘나드는 고개를 숯고개라 불렀다. 이후에 숯다리는 돌로 바뀌었는데 지금으로부터 23년전인 1977년에 이 돌다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폭이 1m30cm, 길이 4m, 두께가 30～40cm였던 이 돌다리는 원래 4개였으나 2개만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숯고개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숯다리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마을역사의 한페이지’를 잃는듯한 애절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은 두번 생각하기 싫은 산골짜기에서의 군대생활을 떠올리고, 실향민들은 두고 온 고향을 바라보며 한숨 짓지만, 대암리 주민들은 옛 멋을 점차 잃어가는 숯고개를 바라보며 현대생활에 익숙해져만 간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세상을 주유하며 떠돌다가, 숯고개에서 잡혔다는 전설을 전해 듣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발길을 옮겨야만 하는 것은 아마 사람이건 마을이건 모든 것이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길이 있든 없든 쉬어 가면 안되는 존재이고, 그래야만 비로소 나그네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숯고개를 잃어가는 대암리도 지금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조상 대대로 마을의 대표적인 역사이자, 전설을 간직해 온 숯다리지만 나그네의 길 떠남과 같은 운명처럼 대암마을도 옛모습을 벗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암리(大岩里)는 1914년 진주군 모태곡면(毛台谷面) 대무동(大舞洞)․평방동(坪芳洞)․혈암동(穴岩洞)․집현면 달리동(達理洞)의 각 일부로 대암리(大岩里)라 하여 집현면에 편입되었고, 행정리별로는 대암마을과 혈암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목화주산지로도 유명한 대암마을은 2000년 10월31일 현재 83세대 299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고추, 오이, 딸기 등 하우스작물을 재배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언제 눈이 내릴지 모르는 겨울 산길이 아닌, 잘 생긴 미녀의 다리처럼 쭉 뻗은 도로변을 달리며 가슴속에 담는 길가의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 보이는 대무동.
대무동 앞산의 형상이 한복을 입은 부인이 춤을 추는 모습같다 해서 대침(대춤이)이라고도 부르는 대무동마을은 대암초등학교와 대암보건진료소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정수리(亭水里)와 경계를 이루는 남방골과 대암 동쪽에서 지내(池內)로 가는 고개인 너재는, 춤추는 부인의 치마자락이 끝간데 자리해 있는듯 아늑해 보인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는 앞산을 눈 앞에 펼쳐두고 자리한 대무동. 옛날 대무동에는 대문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마을 북쪽 입구에 있는 바위가 마을을 지켜 준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마을사람들은 ‘대문이 없어야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을앞 도로공사때 이 바위가 그만 없어졌다.
이때부터 마을에는 화(禍)가 끊이지 않았는데, 마을사람들이 이를 알고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자 액이 물러 났다고 한다.
‘대문이 없는 마을’이었던 대무동은 지금도 그 넉넉한 마을사람들의 인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대암마을의 장석골에서는 해마다 7월 백중이면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장석골 골짜기 절벽에는 제단처럼 생긴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소(牛)의 나이만큼 부침개를 부치고 마을잔치를 벌여 수고를 격려했다.
벼농사가 주업이었던 대암마을은 목화를 재배하면서 농가소득은 물론 부농(富農)에의 길을 걷게 된다. 1930년 목화주산지로 유명한 대암은 집현면은 물론이고 미천면, 명석면 등 인근의 목화를 수매하는 집하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처럼 대암이 목화주산지로 명성을 얻자, 일본 총독부의 관리가 방문할 정도로, 한때 목화재배는 벼농사 다음으로 대암의 주력 농산물이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삶을 일구는 것에 있는 것과 같이 대암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그들의 삶을 일구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암마을의 젖줄인 먹골저수지는 천수답이라는 자연적 제약을 뿌리치고,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삶터를 일군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
먹골저수지는 1940년경에 준설됐는데 당시의 저수지 공사는 한마디로 ‘부역’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의 지원금은 전혀 없었고, 주민들은 지게와 손수레 흙을 퍼다 날랐으며, 무려 2년여의 기간이 걸려 먹골저수지가 완공됐다.
피죽으로 연명했던 당시의 생활상을 감안하면, 중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부역을 나간 주민들은 주전자에 담아온 죽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주민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먹골저수지는 인근 농경지에 풍부한 물을 제공했고, 대암마을의 젖줄로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은 대암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변에 주유소가 들어서, 마을의 모습이 점차 현대적인 농촌마을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집현면 농촌정주생활권 개발계획에 따르면 대암마을은 오는 2004년까지 농어촌주택정비사업이 추진되며 2005년 이후에는 하수도 정비, 농어촌도로정비, 하천정비, 농로포장등이 시행될 예정이다.
대암마을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마치 나그네가 되는 일과 같았다. 자동차가 있을뿐 ‘나그네’가 휘돌아 다녀야 할 길이란 마을의 역사를 만들어 낸 곳과,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지금은 아련한 숯고개의 전설과 목화주산지였다는 작은 사실을 발견하고도 나그네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 것은 대암마을의 숨은 역사를 더 깊이 찾아 낼 수 없었음에 있다.
지게와 손수레에 실린 한 줌의 흙들이 대암마을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듯이, 하늘하늘한 한복차림의 부인이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한 대무동 앞산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대암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