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절인들 사람들이 추위를 타지 않을까. 사시사철 추위를 느끼고 사는 농심(農心)에 사계절은 따로 있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 이 계절의 주황색은 곧 겨울이 닥친다는 예감의 빛이어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농부의 발걸음은 한없이 바빠진다.
황금벌판이 주는 가을(秋)의 가르침을 올해도 변함없이 확인하면서, 차츰 매서워지는 바람을 맞으며 준비하는 기동(基洞)마을 사람들의 겨울풍경 하나.
“마을이장입니다. 오늘 저녁에 마을회관에서 주민회의가 있습니다. 마을어른들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십시오. 그리고 개똥아범은 지난달 안낸 마을회비 꼭 가지고 오세요.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쩌렁쩌렁 울려대는 마을이장의 낯익은 목소리에 하루종일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이틈에 움추렸던 허리를 한 번 펴고 마을회관을 바라보며 잠시 쉼을 가진다.
기동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기동마을회관 옆의 앰프는 동네 소식을 틈틈이 전해주고, 땅을 일구는 농부들이 발빠른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마을의 소식통이기도 하다.
12월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어느 소설가의 외침처럼, 겨울초입에 들어선 기동마을은 평온한 가운데서도 분주한 삶이 영위되고 있는 곳이다.
봇짐을 내려 놓고 묵은 해를 보내는 희망의 언덕길처럼 쭉 뻗은 도로변에 자리한 기동(基洞)마을은 산아래 산이 눕고 길아래 길이 누운것 처럼 보이는 높은 고개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을을 지나 끝없이 길게 누운 도로를 끼고 들어 앉아, 저녁 노을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 기동마을이다.
사촌리(沙村里)에서 행정리(行政里)로 분리된 자연마을인 기동(基洞)마을은 2000년 10월31일 현재 73세대 23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사촌마을과 같이 배로 유명한 곳이다. 진주～합천가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기동마을은 ‘텃골’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변에는 한여름 햇살에도 불구하고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논을 돌보는 아낙네들의 모습에서 땅과 근육이 빚어내는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정경을 지금은 볼수 없다.
하지만 겨을문턱에 서있는 지금, 마을 아낙네들은 한해에도 여러번 잎을 피워낼때 풍년이 된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기동 정자나무 아래에서 사촌배를 내다 팔고 있다.
‘팔려도 그만 안팔려도 그만’이라는 아낙네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배주산지로서의 자부심과 멋을 느끼게 한다.
서리를 맞아 맛이 일품이라는 사촌배를 건네며 듣는 80년 역사의 사촌배이야기와, 지금은 사촌과수작목반이 결성되어 품질향상과 소득증대에 힘쓰는 만큼 풍성한 소득도 약속한다는 자부심도 기동마을의 자랑이다.
진주～합천길을 달리다 보면 금방 눈에 띄는 기동정자나무는 그래서 넉넉한 고향마을 할머니의 품처럼 포근해 보인다.
기동 정자나무는 3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로 한 해의 흉풍(凶豊)을 예고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마을주민들은 느티나무의 잎이 한꺼번에 피면 그해 농사는 흉년(凶年)이고, 몇 번으로 나누어 피면 풍년(豊年)이 된다고 믿고 있다.
농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기동정자나무는 올해도 그 잎을 여러번 피워내 풍년을 일궈냈고, 마을사람들은 내년에도 느티나무가 여러번 잎을 피워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느티나무를 심은 식수자가 죽고나자 3년동안 한번도 잎을 피우지 않았다는 전설을 쫓아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 산비탈에 돌로 된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말무덤 혹은 선비들이 갓안에 쓰던 탕건처럼 생겼다해서 탕건 돌무덤이라고도 하는 이 말무덤은 도로변에 방치된 채 날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자기가 타던 말이 죽었는데, 이곳에 말의 무덤을 만들고 봉분에 돌을 얹어 놓았는데 그 모양이 선비들이 갓안에 쓰던 탕건처럼 생겨 탕건 말무덤이라고 불렀다.
말의 무덤을 만든것도 예사롭지 않은데다, 돌의 모양이 탕건처럼 생겨 마을사람들은 이 말무덤이 필시 깊은 사연을 갖고 있다고 믿고, 마을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문화유산을 접한듯한 느낌을 갖고 도착한 곳이 터골마을이다. 역시 도로변에 자리한 이 터골에는 자선비(慈善碑)가 눈길을 끈다.
‘江陵 參奉 鄭成永 慈善記念’이라는 글귀가 적힌 이 비문은 옛날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정참봉이 집현면민의 호구세를 면하게 해준 보답으로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집현면장 김용석(金溶錫)’이 세웠다고 새겨져 있는데 집현면의 역대 면장중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는 형편이다.
기동남쪽에 있는 관동(冠洞)마을은 오래된 옛지도에서도 관동(冠洞)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으나,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깝고, 기동마을에서 진주시 하촌동으로 넘어가는 절텃골은 지금부터 100년전까지만 해도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촌과 기동의 경계인 주취고개와 봉강으로 가는 고개인 진등골은 기동마을이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마을주민들이 놋그릇을 닦을때 사용했던 기왓장을 주웠다는 북지골은 한때 절이 있었지만, 빈대가 너무 많아 스님이 떠나고, 나중에는 절이 사라졌다는 전설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기동마을 가는 길의 참맛은 집현의 들판을 벗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현면 어느 마을에서건 접할 수 있는 것이 들판이지만 기동마을이 펼쳐 놓은 들판은 색다른 멋이 있다.
명석면 왕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한치골은 큰티골과 작은골 가운데 있다해서 한티골이라 불렸지만, 이같은 마을의 이름은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토를 달 수가 없다.
기동마을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한치골과 접해있는 너른 들판의 이름이 무엇이건간에 차창너머로 보이는 기동마을의 들녘은 가을걷이가 끝난 뒤인데도 항상 풍성해 보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수은주가 곤두박질쳐 서리가 하얗게 내린 신새벽, 옷깃을 여미며 들판으로 나가는 농부의 뒷모습과 내년에도 그 푸른 잎을 피울 것을 약속하는 정자나무가 있는 기동(基洞)마을의 겨울은 항상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