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울음 소리가 주는 넉넉함과 외양간이 있는 집으로의 귀향(歸鄕)을 꿈꾸는 듯한 상념을 갖게 하는 사촌(沙村)마을.
옛날 남강(南江)의 은빛 백사장이 내려다 보였던 구시봉 정상은 언제나 푸르고, 꼬불꼬불한 진주～합천간 도로변을 따라 숨차게 한걸음에 달려온 사촌마을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내 마음속의 고향풍경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다.
사부리 신작로 옆에는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의 손길이 바쁘고, 아버지의 자가용인 오토바이에 올라 앉아, 달콤한 물이 흐르는 배 한조각을 입에 문 아이가 낯선 객의 방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아마 이 아이도 성장해 도시로 나갈 것이 뻔하지만, ‘가을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사촌마을을 그리워 하며 언젠가는 찾아 올거라는 건 분명하다.
아마 잠자리를 얻지 못해 밤새 헤멘 나그네가 아침나절 사촌마을에 들어선다면, 쇠죽 끓이는 농부의 바쁜 손길과 마을 한 가운데 버티고 선 느티나무의 포근함에 취해, 집으로의 귀향(歸鄕)을 꿈꾸게 하는, 그런 아늑함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어 사촌마을은 항상 풍성하다.
서리를 맞아야 참맛이 난다는 사촌배가 지천이고, 지난 1961년에 들어서 40년이 넘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촌정미소(沙村精米所)가 아직도 남아 있어 사라져 가는 우리 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촌마을.
구시봉의 정기(精氣)를 받은 장사(壯士)가 많이 배출돼, 해마다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졌던 씨름판을 휘어 잡았고, 아홉마리의 용이 살다 승천한 구렁 골짜기가 내다 보이는 사촌의 풍경은 시간을 거슬러 옛 삶을 접하는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같은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사촌리(沙村里)는 1914년 진주군 동물곡면(冬勿谷面) 기동(基洞)․사촌동(沙村洞)․관동(冠洞)으로서 사촌리라 하여 집현면에 편입되었다. 행정상 사촌리는 사촌마을과 기동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사촌마을은 진주시와 명석면을 경계하는 마을로 옛날에는 국도가 통과해 교통이 편리했으나, 지금은 산업도로로 격하되면서 교통이 매우 불편한 마을이다.
사촌(沙村)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 일대에 모래(沙)가 많이 있었다 해서 이름 붙여 졌고, 구시봉 정상에서 보면 남강의 모래사장이 훤히 보였다 해서 사촌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사촌 배’로 유명한 사촌마을은 2000년 10월31일 현재 세대수는 73세대이며, 262명의 마을 사람들이 정겨운 삶을 꾸려 가고 있다.
진주～합천간 도로를 따라서 한참을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두지골(斗地谷)을 만날 수 있다.
처음 마을이 생길때 달랑 두집만 있었다해서 지었다는 두지골은 숨가쁘게 달리는 자동차 사이로 지나는 경운기의 아슬아슬함은 있지만, 이름모를 야산 자락에 자리 잡았음에도 마을은 도시내음을 한껏 풍긴다.
마을앞을 지나는 길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집마다 마당에 서 있는 자동차와 경운기, 오토바이 등 문명의 이기(利器)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농촌을 파고 든 현대문명의 이기가 마을을 휩싸고 있지만, 마을앞 정미소(精米所)는 점차 잊혀져 가는 우리것들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배 창고로 쓰이다가 해방이후 만들어졌다는 이 정미소는 지나온 세월을 증명이나 하듯이 기계에 붙어 있는 상표마저도 흐릿흐릿해 보인다.
건물은 낡아 다 쓰러져 가는 듯 하고, 층층이 쌓인 먼지가 마른기침을 불러 오지만, 우리의 옛 것을 찾았다는 반가움에 정겨움마저 든다.
두지골 주민들은 아직도 이 정미소에서 논에서 수확한 햅쌀로 밥을 지어 조상들에게 올리고, 풍성한 농촌의 가을 식탁을 마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때 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배’는 두지골주민뿐 아니라 사촌리(沙村里) 전역의 주요 농가소득원으로 자리해 옛날부터 ‘부자마을’로 이름나기도 했다.
등지게로 거름을 나르던 어려웠던 시절, 사촌의 배는 농가의 고소득을 약속하는 작물이었고 마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장대산 북쪽 허리를 잘라 능선을 타고 들어선 북지산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두지골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열부 성주 배씨’라고 적힌 이 비석(碑石)을 지나면 구지봉의 정기(精氣)를 이어 받아 예로부터 장사(壯士)가 많이 나고, 배로도 유명한 사부리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불멸의 가수인 고(故)남인수씨가 어릴적 나무를 하러 다녔다는 북지산과, 집현의 대표적인 산중의 하나인 장대산을 병풍삼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사부리.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가 마을 한가운데 서 있고, 너른 들판을 마을앞에 펼쳐 놓은 사부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면서도, 부자마을이기도 했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산 아래자락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사부리의 전경은, 어릴적 방학을 맞는 어린아이들의 설레임 처럼 고향내음을 흠씬 풍긴다.
“옛날부터 사촌 배로도 유명했지만, 힘 좋은 장사(壯士)가 많이 나서 한때는 명성이 자자했지”라는 주민들의 말에서 사부리의 옛모습을 회상할 수 있다.
‘서리 내린 뒤끝의 배가 진짜 맛있는 배’라며 흙묻은 손을 쓱쓱 닦고, 과도로 깎아 주는 사촌 배 맛은 마을 풍경과 어울려 자못 감흥을 불렀고, 배를 먹으며 듣는 ‘사촌리 장사(壯士)’이야기는 흥미진진할 정도로 여유있는 마을이 사부리이다.
마을뒤의 국시봉에 올라 멀리 진주를 바라보면, 남강(南江)의 백사장이 한 눈에 들어 오고, 예전에는 마을 일대에 모래가 많았다는 말에서는 이같은 장사이야기는 보다 분명해 진다.
국시봉의 정기를 이어 받은 사부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힘좋은 장사가 많았다고 한다. 사촌리의 유명한 장사(壯士)였던 김갑진씨와 김재만씨가 이 마을 출신이며, 진주뿐 아니라 전국에 명성을 날린 유명한 씨름꾼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씨름대회 우승은 사부리의 몫이었고, 상품으로 받은 황소는 마을 곳곳을 다니며 장사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사촌리의 시름꾼들은 시합을 앞두고는, 훈련삼아 동네청년들이 힘자랑하던 들돌을 들고 국시봉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사부리 김영효씨집 옆에 서 있는 큰돌에는 세월이 흘러 흔적이 희미하나마 마을사람인듯한 재만(載萬)씨의 효행을 추모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부는 지워지고, 또다른 한쪽은 떨어져 나가 또렷하지는 않지만, 마을사람들은 사부리 길목에 서 있는 열부 배씨(裵氏)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0년이 넘도록 마을을 지켜 주던 느티나무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나무주변에 시멘트를 입히는 바람에 지금은 죽고 사라졌지만, 이 느티나무는 마을주민들이 해마다 동신제를 지내며 한해 농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길가에 널린 벼들이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을 띠고, 늦가을 제 멋을 내기 시작하는 나지막한 산들을 지나면 용(龍) 아홉마리가 살다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구렁골이 나온다.
행정구역이 개편된 1914년 이전에 용 아홉마리가 구렁골에 살았는데 천둥번개가 치던 장마때 흰구름처럼 하늘로 승천했다 해서 구룡(九龍)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논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수로에는 피리인듯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고즈늑한 구렁골은 명석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멀리 명석 동신아파트가 한 눈에 들어 오는 곳이기도 하다.
배꽃향기 그윽한 사촌(沙村)은 시와 소설을 찾아 가는 여행길과 같이 집현의 추억속 사진 한 장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