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사(凝石寺) 일주문에서 합장(合掌)을 하고 경내에서 벗어나 숲길을 걷는다.
산 좋고, 물맑고 구름과 수풀이 깨끗하고 동네가 좋고 샘이 달고 비옥하여 정히 숨어 사는 사람이 행실을 닦을만한 곳.
마치 그 속에서 세상의 모든 시름이 녹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끼리건, 연인사이건 발짝소리조차 낮춰 걷는 듯 하다. 그러면 사라졌던 님조차 물을 건너 다시 돌아올 듯한 고요.
‘경건함은 절간에 있는게 아니라 숲속에 있다’하면 스님들은 필경 불경스런 말을 읊조렸다고 불호령을 내리실터이다.
집현산(集賢山) 아래 응석사(凝石寺) 가는 길의 참 맛은 고향의 들판을 벗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암리에서 응석사로 가는 정평도로 양켠에는 늘 아득한 들판이 펼쳐진다.
한여름에는 그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의 모습에서 비옥한 땅과 힘줄이 돋은 근육이 빚어 내는 노동의 신성함을 느낄수 있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을 뒤로 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을걷이에 나선 결실의 계절을 언제나 맛볼수 있는 응석사 가는길.
응석사(凝石寺)가는 일은 싱그럽다. 집현(集賢)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설렘이 있는데다, 전통사찰(傳統寺刹)이 가진 역사와 기록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응석사(凝石寺)와 수백년된 정자나무 10여그루가 모여 앉아 자태를 뽐내는 정자등을 지나면, 길가에는 벼들이 나란히 누워 있고 추수를 끝낸 들녘은 겨울농사 준비로 바쁜 정평리(亭坪里)
정평리는 1914년 진주군 모태곡면 정자동(亭子洞)․평방동(坪芳洞) 일부로 정평리(亭坪里)라 했다. 정자동(亭子洞)의 정(亭)과 평방동(坪芳洞)의 평(坪)자를 따서 이름지어진 정평리는 2000년 10월31일 현재 96가구 273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시설채소를 재배하며 정평을 지키고 있다.
‘범인(凡人)들이야 꽃이 피는 아름다움에 취해 서글픔과 외로움에 빠져 들뿐, 지는 꽃잎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랴’.
정평(亭坪)을 가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던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정평마을에 들어서면서 쉽게 구해졌다.
집현(集賢)의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을 찾아 떠난 길에는, 가을걷이한 곡식들이 가로 누운 길가 한켠으로 아득히 펼쳐진 들판과 마을, 그리고 정자나무 그 뿐이었다.
경건함은 절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숲속에 있듯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정평의 삶터인 마을과 풍경, 들판 곳곳에 있었다.
응석사를 찾아 가는 길동무야 몇이나 되랴마는, 한여름 꾸역꾸역 더위를 피해 정평도로를 재촉하는 사람들은 길을 메우고 남을 정도로 부지기수다. 그런 한 가운데 바로 정평(亭坪)이 있었던 것이다.
정평도로로 차를 몰아 정자동(亭子洞)으로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마을안길과 친구한 아득한 들판이 늘어 서 있다. 들판을 지나 한참을 달리면 수백년을 꽃을 피운 10여그루의 느티나무와 푸조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자등이 길 건너편에 가만히 있다.
수천평을 가득 메운 송림(松林)처럼 웅장한 멋은 없지만, 마을의 여유와 멋을 한껏 뽐내는 정자등.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2그루나 있다는 말보다는 정자등에 올라 옛날 선조들이 들판에서 돌아와 잠시 땀을 식혔던 내음을 먼저 맡아보게 한다.
응석사를 찾는 객(客)들이 잠시 쉬어 가기도 했던 정자등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응석사의 전통과 무지개샘의 물맛, 그리고 도량의 경건함이었을까.
아마 정자등이 준 것은 전통도, 물맛도, 사찰의 경건함을 되새기는 시간이 아닌, 마을의 아늑함과 달콤한 휴식, 그리고 삶을 돌아 보는 여유이다.
‘지는 꽃잎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랴’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처럼 너무 쉽게 구해진 것이다.
대암초등학교에서 1km떨어진 곳에 있는 평방동(坪芳洞)에는 저수지와 이웃하고 있는 도룡골(道龍谷)과 집수골(集水谷)․아래골․배낭골․창대골 등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 일대에 100여호가 살던 대촌(大村)이었는데, 병자호란 후 격감되었다고 한다.
집현산 아래 깊은 골(谷)에 절(寺)이 많았는데, 지금은 응석사만 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내안골은 예로부터 골이 깊고 물이 좋았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지금부터 몇십년전만 해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 주민들이 내안곡에서 아기부처를 주워 오곤해, 내안곡에 절(寺)이 많았다는 전설을 뒷받침 하고 있다.
평방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장군 무덤이 있다고 전하는 숨박골을 멀리 내다보는데, 집현산 동쪽 중턱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효자암(孝子菴)의 잔영이 보이는 정평의 전통은 딱딱하기보다는 순박해 보였다.
숨박골 장군무덤에는 장군석 2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지금은 비석도 없어지고, 많이 훼손돼 있는 상태로 방치돼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장군무덤의 기운을 얻기 위해 주변에 묘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응석사 일주문을 나서며, 길가에 심어 논 벛꽃길이 가로막지만 집현의 역사와 정평의 현대사를 찾으려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법화도량(法華道場) 해룡사(海龍寺)에 들러 주지스님을 친견(親見)하고, 응암사를 지나 정평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산(山), 들(野), 물(水)과 사람(人)만이 반겨준다. 곧 정평의 산과 들, 물 그리고 정평마을 사람이리라.
정평마을을 되돌아 나오는 길건너 편에 호랑이 굴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굴이 눈에 띈다. 혈암 굼바우에서 불을 피우면 석달 열흘만에 정평(亭坪)마을의 한 곳에서 연기가 난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는 곳이 바로 이 호랑이굴이다.
‘혈암에서 이곳 정평까지 굴이 연결돼 있느냐’는 물음이 왠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왜’냐고 물어보니 그냥 희미하게 웃는다.
호랑이굴을 보고 나니, 이제야말로 정평(亭坪)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평마을보다는 응석사나 정자등, 무지개샘으로 더 유명한 정평마을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지금 정평마을은 개발(開發)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집현산등산로 개설과 응석사 무지개샘 위 소공원 조성, 정평저수지 도로변 나무식재 등 집현산개발이 추진중에 있는 것이다.
현재 진주시는 집현산 응석사 부근에 2,100만원을 들여 등산로 종합안내판과 유통 유래판, 방향표시판 10개소를 설치한 것을 비롯해 휴식시설로 파고라 1식, 평의자 8개소를 설치했다.
이같은 개발계획이 완료되고 나면 정평마을은 집현면내의 유일한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더불어 농가소득증대에도 한 몫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집현면 농촌정주생활권개발계획상 정평마을은 오는 2004년까지 주택신축․개량 등 주택정비사업이 진행될 예정이고, 오는 2005년 이후에는 마을내도로개설과 하수도 정비 등 마을기반정비사업, 농어촌소공원조성, 농산물선별시설과 저온저장고 설치, 농로포장 등의 사업이 추진될 계획이다.
또 환경보전을 위해 쓰레기처리시설과 하천을 정비해 정평리를 관광을 테마로 하는 중심마을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지금 응석사에는 ‘대웅전 법당 보수불사’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스님들의 움직임에는 전혀 바쁜 티가 없다.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건 영영 한참이란걸 깨달으려면 동백이 막 지고난 후의 봄에 오라는 뜻일까.
정평마을 들녘에서 가을걷이에 한창인 마을사람들의 쉼없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동백이 지고 난 후인 봄(春)의 정평이 그리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