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을 정원삼아 보낸 40년 세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진료
 
 
진주성 공북문 앞에서 정문쪽으로 10여미터를 가다보면 옥상에 안테나가 서있는 5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33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은 다름아닌 ‘박애의원’과 ‘건일약국’이다.

박애의원은 민종기(72세)씨가 건일약국은 박용태(66세·여)가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결혼과 동시에 병원을 개업해 지금까지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이들 의사-약사부부가 함께 살아온 40년간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기자는 명석면에 살고 있는 전봉기(67세)씨가 자꾸만 떠올랐다. 40년 동안 개울의 바윗돌을 옮기는 일만 해온 전씨와 같은 세월을 오로지 환자 돌보는 일에만 매달린 민씨 부부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었다.

남편 민종기씨는 밀양에서 태어나서 경북대 의대를 나왔고, 박용태씨는 부산 태생으로 부산대 약대를 졸업했다.

1960년 중매장이의 소개로 만난 민씨 부부는 결혼 후 곧바로 지금의 골동품 거리에 방을 얻어 병원과 약국을 동시에 개업했다. 병원과 약국 이름은 그때 지은 것이다.

’박애’라는 이름은 기독교 냄새가 풍기는 단어지만 두사람은 전혀 종교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널리 사랑한다’는 뜻이 좋아 병원이름으로 제격이다 싶어 그렇게 지었다. ‘건일’은 ‘건강이 제일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처음 병원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진주에는 이렇다할 병원이나 약국이 없었다.

”윤양병원이 있었고 제일외과, 민외과, 최안과가 있었지. 모두 합쳐봐야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였지.”

박씨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병원을 열고난 뒤 하루에 100명 이상의 환자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찾았다. 특히 박애의원과 건일약국은 사정이 딱한 사람들에게 진료비를 깍아주고, 병원과 상관 없는 걸인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최근까지도 남편 민씨는 그런 사람들이 오면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점심값을 손에 쥐어주고 나서야 돌려보냈다.

”돈을 깍거나 무료 진료하는 것이 의료법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여린 남편은 막을 수 없었다. 점심값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20년 넘게 오는 사람도 있다”

민씨 부부는 병원 문을 연지 꼭 10년만에 지금의 자리에 자신 소유의 건물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진주에 5층짜리 건물이 선다는 것은 큰 화제거리였다. 게다가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고 외벽을 유리로 처리한 신식 건축물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됐다. 하지만 건물의 겉모습과는 달리 실제로 병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지는 18평에 불과하다.

진주성 후문(지금의 공북문) 앞으로 이사를 온 뒤로 병원 운영은 더욱 잘됐다. 병원과 약국은 찾아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볐고 이때문에 두 사람은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한때 이들 부부는 모은 돈으로 진주에서 건물 여러개를 더 사기도 했다.

하지만 사는게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다. 환자를 진료하는 것 외에 세상 물정을 몰랐던 이들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병원 건물마저 은행에 넘어갈 판이었지만 그래도 병원 운영이 잘 됐기 때문에 몇년만에 극복할 수 있었다.

민씨 부부가 명석의 돌집 주인을 닮았다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거의 40년 동안 설·추석을 제외하고는 병원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

2000년 의료계가 집단 휴·폐업을 한 기간이 그들에게 유일한 휴가였다.

”그때 40년만에 처음으로 문을 닫고 통도사며 쌍계사 표충사를 다녀왔지. 하지만 그때뿐 지금은 그 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어.”

그 후로 부부는 두번더 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었는데, 박씨의 환갑 때 유럽 여행 한번, 민씨의 진갑 때 일본 여행을 한 것이 또 한번이다.

이들이 병원을 떠나본 일은 이렇게 세번 밖에 없다. 심지어 박씨는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진주성을 지금껏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다니 말 다한 셈이다.

”그래도 5층 옥상에 올라가면 진주성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거기서 내려다 보면 진주성이 마치 내집 정원 같다”

박씨는 40년을 그렇게 진주성을 정원 삼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여름 이후로 박애의원은 문을 닫고 건일약국만 운영하고 있다. 현관 문찰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잠시 휴업합니다”라는 문구가 나붙었는데,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7월 민씨가 환자를 진료하는 도중에 갑자기 쓰러졌다. 평소 고혈압이 있었는데 이때 뇌의 실핏줄이 터져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사고가 난 부위가 신경 조직이 몰려있는 곳이 아니어서 그나마 회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씨가 입원한 뒤로 박씨도 약국일을 제쳐두고 남편 민씨를 간호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부부는 슬하에 외아들을 두고 있는데, 현재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2개월 안에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병원 문을 열 생각이다. 만약 두달 후에도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면 병원문을 닫고 아들네로 옮겨가야 겠다”

박씨는 그들과 한몸인냥 버텨온 병원이 다시 문을 열어 하루빨리 사랑을 널리 퍼 줄 수 있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