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연이 머무는 곳 '죽향'
본성동 전통찻집 '죽향'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누구나 그 사람으로 하여 잊지 못할 공간이 있다. 평생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났다거나 제 마음 제대로 건네지 못해 끝내 헤어짐을 나누던 그런 곳이 있기 마련이다. 빛을 따를 만큼 빠른 속도로 세상이 변해가도 사람들은 한 계절이 변할 때는 꼭 ‘그 곳’을 찾아 기쁨과 슬픔을 마주보게 한다.

청소년 수련관 옆에 자리한 ‘죽향’은 좋은 인연들의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머물러 있는 마음수련관 같은 곳이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주류를 이루던 오래된 전통찻집이 90년대 후반 들어 많은 수가 문을 닫아 8년째 한 자리를 지켜 온 죽향이 진주 전통찻집의 맏이인 셈이다.

“차를 한다는 것은 찻집을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차를 제대로 알고 곁에 두는 것 자체가 ‘차를 하는 사람’으로 보면 된다”는 김형점(39)씨는 남편 김종규(43)씨의 외조 덕분에 더욱 안정적인 찻집을 꾸려갈 수 있다고 한다.

찻집의 분위기를 더하는 것은 멋진 인테리어가 아니라 사람 냄새라고 자부하는 김 씨는 옷맵시와 정갈한 머리 올림, 단아한 말투에서부터 차 향에 젖어들게 한다. 이 정갈함은 죽향 곳 곳 묻어 나서 지나친 기교 없이 편안한 장소를 이룬다.

죽향과 인연이 되려는지 김 씨가 도움을 많이 얻었다는 ‘권도사’를 만나는 기막힌 인연 덕에 때마침 진주 전통찻집의 역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80년대 주류를 이루던 진주의 전통찻집 하면 가장 먼저 생긴 ‘아란야’, 지금 시내의 우체국 맞은편에 자리했던 ‘다화랑’ 구 금성초 맞은편 ‘희다원’구 동명극장 맞은편 ‘다람’ ‘다향’, ‘다농’ 등이 있다. 자리한 것만으로는 8년을 넘은 찻집이 구 MBC 맞은편 선다원, 가좌동의 그리운 소나무가 있지만 중간에 잠시 업종을 바꾸거나 주인이 바뀌었다.

“80년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좋은 전통찻집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례로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차가 마시고 싶어 찻집을 시작했죠”

김 씨는 97년. 서른 초반의 젊은 나이에 찻집을 시작해 주위에서는 젊은 사람이 뭐 그런 일을 하느냐는 얘기도 들었다.

“선배 다인들의 모범과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죽향이 없었을 것”이라며 겸손함을 얹는 김 씨는 차를 마시는 일은 영혼을 잠시 쉬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 씨는 주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만큼 차를 찾는 이들이 편히 쉬게 할 수 있다는 철학 덕에 한 쉬도 쉴 틈이 없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 분위기 잡으면서 찻집이나 할까 생각하잖아요.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해 보니 정말 부지런히 움직여야 된다는 걸 깨달았죠”라는 김 씨는 8년 찻집을 운영하면서도 한 명의 인연에게도 섭섭함을 줄 수 없어 문을 닫은 적도 없다.

이런 성실함은 차를 만들 때, 재료를 구하고 손질 할 때, 정갈한 다식을 준비하는 데 골고루 사용된다.

양념이 따로 없는 차 맛이 최고가 되려면 재료가 가장 중요한 법, 그래서 죽향에서는 한 해의 좋은 재료를 겨울에 준비해 놓는다. “요즘 월동준비가 한창이어서 새벽 2시까지 잠을 못 자요. 좋은 재료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좋은 것을 먼저 구해 손질해 두는 일이 중요하죠”

그 성실함는 3일에 한 번 지리산에 가서 생수를 받아 오는 것에도 뻗친다.

계절에 맞게 또 차의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나오는 다식을 준비하는 것도 김 씨의 몫이다.

쫀득한 무화과 절임, 정갈하게 잘라 모양 낸 곶감, 부드럽고 담백한 녹차시루떡,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보리 가루 떡, 호박 영양갱을 비롯한 한과, 정과들은 바라만 보아도 충만해진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맑고 향기롭다고 했던가. 죽향에 인연을 둔 이들 중에는 유난히 좋은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 캐나다로 이민을 간 박애치과 부부는 잊지 못할 인연 중에 하나다. 매일 점심때만 되면 다정한 모습으로 찻집을 들러 여유를 즐기는 박애치과 부부를 보고 김 씨는 참 감동적이었는데 자녀가 5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저 여유가 어디서 나오나 놀랬다고 한다.

가끔 한국에 나오는 아버지 편으로 5명의 자녀는 오미자차며 가래떡 주문이 쇄도를 한다. 이처럼 죽향에는 밝고 건강하고 가족 손님들이 많다. 또 어린 단골 중에는 산청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있는데 죽향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잠을 설칠 정도라고 한다.

좋은 인연들이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는 김 씨는 3층의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좋은 인연들과 정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올 연말에는 지인들과 ‘차와 함께 하는 국악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죽향에는 외국인 손님들도 많은데 캐나다와 LA에서 외국 손님들은 제 나라로 돌아가 전통찻집을 열겠다며 죽향에서 성실히 차를 배워갔다.

죽향에 들리면 각박한 세상에서도 계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봄에는 향긋한 매화향, 여름엔 시원한 매실차로 속을 달래며 쌀쌀한 가을이 찾아들면 모과차 한 잔, 겨울에는 죽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죽향미인’을 곁에 두면 그보다 더 행복한 여유가 있을까.

한 사람을 생각하며 계절 바뀔 때마다 매화꽃, 국화꽃, 감잎을 예쁘게 모아 전하는 애틋한 마음이 죽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다.